이르쿠츠크를 출발해 안가라강을 따라 내려온 횡단철도를 막아선 것은 바이칼이라는 거인이었다. 둘레만 해도 2100km에 이르는 호수가 극동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열차가 달려야 할 호수 남쪽의 동서 호안(湖岸)은 바이칼의 호위무사라도 되는 듯 인간의 접근을 막았다.
열차 28량 싣고 바이칼 건넌 쇄빙선철길을 놓기 위한 인간과 자연의 싸움이 시작됐지만 바이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인간들은 바이칼 남쪽 절벽과의 전투에 악전고투하는 동안 임시방편을 찾았다. 바이칼과 만나는 안가라강의 입구에 큰 배가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었다. 포트바이칼(Port Baikal)로 불리는 항구에서 열차 페리를 운행하기 위해서였다. 서쪽에서 달려온 횡단열차는 포트바이칼에서 증기선에 옮겨져 호수 건너편 미소바이아까지 간 뒤 다시 육지로 옮겨져 동쪽으로 가는 선로를 탔다.
배 두 척이 영국에서 부품 상태로 도입되어 리스트뱐카 조선소에서 조립됐다. 그중 하나의 이름은 ‘바이칼호’로 유럽에서 제일 큰 페리였다. 바이칼호는 800명을 수용하는 객실을 갖췄고 화물 적재 칸에 장치된 선로 위로 객차 28량을 적재할 수 있었다. 이보다 작은 배는 ‘안가라호’였는데 150명의 승객만 태울 수 있었다. 배들은 날씨가 좋을 경우 편도 4시간 정도의 뱃길을 하루에 두 번 왕복했다. 바이칼호는 쇄빙 기능이 있는 배로 초겨울 얼음 정도는 깰 수 있었다. 바이칼호가 얼음을 부수며 길을 개척하면 안가라호가 뒤를 따랐다.
여름철 폭풍우가 치거나 기상이 안 좋을 때 승객들은 날이 좋아질 때까지 항구에 잡혀 있어야 했다. 본격적인 겨울 추위가 시작되어 바이칼의 얼음이 두꺼워지면 쇄빙선인 바이칼호도 운행할 수 없었다. 대신 썰매와 4륜 마차가 동원됐다. 봄부터 가을까지의 열차 페리도 승객에겐 파도와 멀미로 공포와 고통을 제공했지만 겨울의 바이칼 횡단은 끔찍한 고난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영하 30∼40℃의 혹한 속에 7시간 이상 썰매를 타야 하는 일은 지옥을 통과하는 여정이었다. 얼음 호수 위에 6.5km마다 설치된 간이 휴게소에서 여행자들이 몸을 녹였지만 다시 길을 나서자마자 살을 에는 추위가 썰매 위의 승객들을 덮쳤다. 이런 고통을 줄이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가 제안되었다. 얼음 위에 임시 선로를 놓아 열차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미 발트해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까운 섬인 크론시타트까지 약 32km 거리의 빙판 위 임시 선로를 부설해 겨울철 혹한기에 운행한 경험이 있던 터였다. 하지만 바이칼은 얼음 두께도 균일하지 않았고 곳곳에 얼음이 갈라져 생긴 크레바스가 존재하는 위험한 호수였다. 이 때문에 얼음 위 임시철도 부설은 공상으로 치부되며 시도되지 않았다.
1904년 4월, 러시아 병사들을 삼킨 바이칼호그런데 허황된 일을 현실화하는 일이 벌어졌다. 인간에게 늘 선을 넘으라고 다그치는 전쟁이 극동에서 일어났다. 실전을 간절히 바라던 일본이 가운을 벗고 링 위에 올랐다. 러일전쟁은 러시아가 바이칼 순환철도 건설에 온 힘을 쏟는 계기가 된다. 중국 뤼순과 우리나라 제물포(인천의 옛 이름)에서 일본군에게 일격을 당한 러시아 해군의 복수를 위해 만주와 조선에서 러시아 육군이 나서야 했다. 군대 파견과 보급을 위한 병참 철도가 절실했다.
러시아 군사령관 쿠로팟킨은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제 역할을 못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쿠로팟킨은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 바이칼 순환열차의 신속한 개통이 필요하다고 편지를 썼다. 그러나 바이칼 순환철도 건설 공정은 더디기만 했다. 이때 그동안 구석에 처박혀 있던 얼음 위 선로 건설 방안이 추진되었다.
1904년 3월, 러시아군은 급한 대로 바이칼 얼음 위에 선로를 놓았다. 해빙기가 다가와 얼음이 깨질지 모르는 공포를 안고 1600량의 화물칸과 군사들이 얼음 위 선로를 횡단했다. 걸어서 바이칼을 건넜던 병사들은 추위로 얼어 죽는 공포를 덜긴 했지만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로 빨려들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이런 두려움은 곧 현실이 되었다. 4월, 바이칼의 얼음은 러시아군의 보급품과 병력을 태운 열차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기관차와 화차가 병사들과 함께 얼음 아래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일본 언론들은 천왕의 신령스러운 바람 가미카제가 얼음을 녹여 러시아군을 삼켰다고 대서특필했다. 경부선과 경의선을 타고 북쪽 전선으로 진격한 일본군은 이미 추위와 굶주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군을 코너에 몰아넣고 소나기 펀치를 퍼부었다.
우리 일행은 순환열차의 식당칸에 자리를 잡았다. 열차 여행을 하면서 맥주 한 캔 따지 않는 것은 철도 여행자의 도리가 아니다. 안주는 바이칼에서 잡힌 물고기를 훈제한 ‘오물’을 시켰다. 짭짤하면서도 차진 식감의 오물은 맥주 안주로 비할 데가 없었다. 수분이 담겨 쫄깃한 맛이다. 한국에서 먹는 노가리와 먹태 같은 마른안주와는 또 다른 독특한 맛이었다.
식당칸에서는 바이칼 순환열차의 역사와 운행 노선에 대한 정보가 담긴 책을 팔았다. 몇 권 남지 않은 영문판 중 한 권을 골라 들었는데 몇 쪽이 물에 젖었다 마른 흔적이 있었다. 이때부터 흥정이 시작되었다. 판매원과 나는 수산시장 경매원 같은 심각한 표정으로 전자계산기에 숫자를 적어 돈의 액수를 주고받았다. 판매원이 고개를 흔들면 나는 책의 불어터진 쪽을 펼치며 인상을 썼다. 머릿속에 생각한 가격으로 흥정을 마친 뒤 만족스럽게 돌아섰지만 몇 초가 지나자 조금 더 깎아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간사한 인간의 마음은 어쩔 수 없나보다.
10시간에 가까운 운행을 마치고 순환열차는 포트바이칼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서행하는 열차의 창밖에는 항구와 관련 시설들이 보였다. 녹슨 배와 어구, 정비창 같은 것이 방치되어 있었다. 미래소년 코난이 불쑥 나타나거나 로봇군단과 저항군이 싸워도 하나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항구 끝에서 열차는 멈춰 섰다. 승객들은 짐을 챙겨 항구로 향했다. 바이칼 순환열차를 탄 승객들은 강 하구 건너편 리스트뱐카로 가서 이르쿠츠크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거나 숙박을 한 뒤 알혼섬에 가는 배를 탄다. 모두 포트바이칼 선착장으로 이동해야 한다.
나는 포트바이칼에서 꼭 봐야 할 곳이 있었다. 그곳을 찾기 위해 일행을 앞서 빠른 걸음으로 선착장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처음 와보는 곳이지만 낯이 익은 장소다. 마침내 한 장소에 이르러 나는 배낭을 내려놓고는 후반 추가 시간에 역전 골을 넣은 축구선수처럼 두 손을 하늘로 올리며 감격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웬 미친놈인가 하는 표정도 나를 말리지 못했다.
순환열차에서 먹은 쫄깃한 ‘오물’과 맥주내가 선 자리는 선로전환기가 있던 장소였다. 포트바이칼에는 열차 페리인 바이칼호가 접안할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있었다. 역에서 나온 선로는 선착장으로 이어지다가 호수를 향해 난 둑을 따라 Y자로 갈라진다. 일반적인 선로 규정 방식을 준수했다면 역과 가까운 선로는 선착1번이나 부두1번으로 정해졌을 것이고 나머지는 선착2번 선이었을 것이다. 바이칼호가 어느 선착대에 도착하느냐에 따라 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이곳 선로 분기점에 일단 정차했다. 선로전환수가 배가 들어온 부두를 향해 선로전환기를 돌리면 기관차는 입을 벌리고 있는 페리 안으로 객차나 화차를 밀어넣는다.
길은 철도노동자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철도 노반 흔적을 갖고 있었다. 양쪽으로 갈라지는 선착장과 철도 노선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수십 번도 더 본 100년 전의 사진 덕분이었다. 1903년, 영국 신문 와 의 특파원 생활을 했고 여행 저널리스트였던 조지 린치는 일본을 출발해 조선과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다. 린치는 바이칼 동쪽 미소바이아에서 서쪽의 포트바이칼까지 열차 페리로 이동했다.
린치의 기행문은 한국에서 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의 표지 사진이 바로 포트바이칼의 100년 전 모습이다. 뒤늦게 도착한 일행들에게 휴대전화에서 검색한 사진을 보여주며 현장과 비교해보게 했다. 모두 신기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옛 사진과 닮은 흔적을 찾았다. 목재로 만들어진 증기기관차 급수대가 있던 자리며 페리가 육지의 선로와 정확히 맞추기 위해 접근했을 선착장 끝의 구조물을 보았다. 여기저기서 당시 사람들의 북적이는 소리가 들리고 증기기관차가 기적을 울리며 수증기를 내뿜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한 손에 J자형 손잡이가 달린 우산을 들고 레이스로 치장된 치마를 입은 여인이 추격자가 오지 않나 두리번거리며 어서 페리로 올라타 극동으로 가자고 내 손을 잡아끌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를 잡아끈 것은 환바이칼 순환열차의 승무원이었다. 승무원은 원래 예정되어 있던 이르쿠츠크까지의 버스편이 취소되어 배로 가게 되었다고 전해왔다. 승무원이 사전 약속과 달라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했다. 나는 이게 웬 행운인가 쾌재를 불렀다.
포트바이칼에서 150명 정도 정원의 배에 올라타자마자 뒤 갑판으로 올라갔다. 배는 항구를 떠나자 속력을 높여 안가라강의 품으로 달음질쳤다. 조금씩 바이칼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안녕, 바이칼!
배는 1시간 넘게 물살을 헤쳤다. 바이칼이 흘린 눈물, 안가라는 바이칼의 딸이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연인 예니세이를 찾아 떠났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생각하는 동안 도도하게 흐르는 안가라의 바람이 쉬지 않고 머리를 날렸다. 이르쿠츠크 선착장에 내렸지만 우리 일행은 난관에 부딪혔다. 내린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이르쿠츠크역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시간은 밤 9시가 넘었고 해는 거의 넘어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여행 온 서른 즈음의 여성 안나가 길을 안내해주었다. 퇴근길 승합차에 구겨지듯 적재된 우리는 정원의 두 배가 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신음을 삼키다 이르쿠츠크 중앙시장에서 내렸다. 이르쿠츠크 중앙시장은 어느새 사는 동네처럼 익숙한 곳이어서 마음이 편했다.
레닌이 맞아준 크라스노야르스크 역사트램 정류장을 찾으니 파장 시간이어서 옷가지와 인형 등을 파는 노점상이 물건을 정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1번 트램을 15분 정도 타고 5군단 거리를 지나 남만춘 다리를 건너면 바로 역이다. 역의 짐 보관소에서 배낭을 찾아 대합실에 앉아 열차를 기다렸다. 대합실 곳곳의 의자와 전기 콘센트가 있는 벽 쪽 바닥에선 배낭을 쌓아놓고 팔을 모은 채 얼굴을 묻은 여행자들이 열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열차에 다시 수감된다는 사실이 약간 두렵긴 했지만 하루 종일 달린 고단한 여행자에게는 누울 자리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자정이 넘자 열차가 들어왔다. 한 무더기의 승객들이 열차에서 내리고 또 그만큼 탔다. 어둠 속 손전등에 의지한 차장이 승차자의 여권과 승차권을 일일이 확인했다. 새벽 1시2분, 열차는 정시에 출발했다. 차장이 다시 객차 안을 돌며 승차권을 확인하고는 침구를 나눠주었다. 우리는 능숙한 솜씨로 매트리스 위에 시트를 씌우고 잠을 청하려 했으나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가 아직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장거리 여행이기에 짐을 줄여야 해서 주저 없이 잔을 챙겼다.
피곤한 덕에 흔들리는 침대를 자장가 삼아 곯아떨어졌다가 태양이 뜨거운 손으로 차창을 두들기는 바람에 잠을 깼다. 열차는 정거장에서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습관적으로 휴대전화를 열어 인터넷 연결이 되는지 확인했다. 간밤에 전자우편이 하나 와 있었다. 발신자는 우리가 도착할 도시인 크라스노야르스크에 예약한 호스텔 주인이었다. 주인의 이름은 알톤이었다. 이르쿠츠크에서 길을 잃은 우리 일행을 안내해준 친구도 알톤이었다. 우리는 알톤이란 이름을 ‘러시아의 김 서방’쯤 되는 것으로 간주하자고 합의했다.
알톤은 만약 기차를 타고 온다면 역으로 픽업 서비스를 오겠다며 필요하면 답장을 달라고 했다. 이미 이르쿠츠크에서 한바탕 헤맨 경험이 있었던지라 기쁜 마음으로 답장을 보냈다. 얼마 뒤 알톤에게서 열차 도착 시간에 광장 앞에서 만나자는 전자우편을 받았다. 기분이 한결 편해졌다.
여행 초반 3박4일간의 지독한 열차 여행 경험은 단단한 예방주사 역할을 했다. 이르쿠츠크에서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의 16시간 정도는 너끈히 버틸 수 있었다. 객차도 신형이어서 화장실이 하나 더 추가되었고 물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나란히 붙어 있는 화장실의 존재는 급한 순간 누군가 점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떨쳐주었고, 실제로 하나의 화장실이 주는 불편을 말끔히 덜어주었다. 오후 6시, 열차는 예니세이강을 건너는 철교를 통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크라스노야르스크역에 도착했다. 크라스노야르스크역을 나오자 역사 오른쪽 건물 벽면에 거대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벽돌 모자이크로 그려진 3개의 대형 그림인데 붉은 기를 들고 행진하는 군중, 바바리코트를 입은 레닌과 그의 동지들이 걷는 모습 등이 담겨 있었다. 횡단철도를 끼고 있는 주요 도시 어디에서나 레닌을 만날 수 있었다.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이든 트라우마이든 간에 혁명과 사회주의는 러시아를 관통하는 줄기 중 하나였다.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환영해줄 것 같은 숙소낡은 도요타 승용차를 몰고 온 알톤은 우리 일행을 바로 알아봤다.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알톤은 10분여를 운전해 한적한 주택가 뒤편 15층 높이의 맨션 앞에 차를 세웠다. 맨션은 과연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고요했다. 어디에도 호스텔 같은 것은 있을 법하지 않았고 간판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알톤은 맨션 한쪽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계단은 밖에서 보면 시멘트 담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알톤의 픽업 서비스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좋은 지도로도 쉽게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하로 이어진 계단은 한 번 더 꺾어 내려간 뒤에야 현관문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저항세력의 비밀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문을 열면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달려나와 두 손을 맞잡고 환영해줄 것 같은 숙소에 짐을 풀었다.
글·사진 박흥수 기관사·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 객원연구위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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