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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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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동화가 시작됐다

러시아혁명 이후 첫 희생양 한인, 추위와 굶주림 속에 40일간 화물칸 타고 중앙아시아 벌판으로 강제이주
등록 2015-12-10 22:57 수정 2020-05-03 04:28

그리하여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끈 혁명은 성공했대요. 그리고 러시아 민중은 소비에트를 건설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끝.

할머니가 들려준 아름다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지만 현실은 잔혹동화였다. 돼지들의 우두머리 ‘스탈린’이 무엇이든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며 어떤 동물도 술을 마셔서는 안 되고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고 선언한 뒤 공포는 시작됐다.

시베리아에서 돼지들의 명령에 희생된 첫 번째 제물은 카레이스키, 곧 고려인 또는 조선인이라 불리는 한인이었다. 1937년 8월21일 ‘극동 변강 국경지역 거주 한인 이주에 관한 공동 결의문’이 발표된다. 공동의 주체는 ‘소련 인민위원회 소비에트’와 ‘전소 볼셰비키공산당 중앙위원회’였고 서명자는 몰로토프와 스탈린이었다.

강제이주의 명분은 극동 변강 내 일본 첩자의 침투를 차단하겠다는 것이었다. 한인 이주가 결정되자 극동뿐만 아니라 러시아 전역에 살고 있던 한인들은 졸지에 적국의 첩자 취급을 받았다. 극동에 살던 사람들은 일본과 내통하는 세력으로 간주됐다. 러시아혁명에 온몸을 바쳤던 한인에게는 조국 러시아를 배신했다는 엉뚱한 죄명이 씌워졌다.

한인 혁명가들은 살아서 땅을 밟지 못했다

인민의 원수가 된 한인 혁명가들은 소비에트연방공화국 형법 제58조에 따라 기소가 되면 모두 사형을 선고받고 바로 총살형에 처해졌다. 소련 내무인민위원회에 이미 제거 대상자 명부가 작성돼 있었다. 광범위한 살인극이 자행됐다. 형식적 재판이 열리거나 아예 재판조차 없이 한인 지도자로 간주된 사람들은 총살장으로 끌려갔다.

강제이주 열차를 탄 사람들은 제58조의 기소를 면한 한인이었다. 9월부터 연해주 지역 한인들에게 강제이주 명령이 떨어졌다. 5∼6일치 식량과 꼭 필요한 물건만 챙기라는 명령에 한인들은 도착지가 기껏해야 하바롭스크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촌 언덕 밑의 페르바야레치카역,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의 라즈돌노예역, 우수리스크역에서는 강제로 내몰린 한인들이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라타야 했다. 강제이주 열차들은 기관차 뒤에 50량의 객차와 화차를 연결했다. 호송을 책임지는 내무인민위원회 병력이 쓰는 여객칸 1량, 위생보건칸 1량, 식당칸 1량이 연결됐고 나머지는 모두 화물칸이거나 가축수송용 칸이었다. 한 칸에 5~6가구 30여 명을 태웠다.

열차가 출발하자 널빤지를 덧댄 화물칸엔 칼바람이 들어왔다. 식수나 먹을 것도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 소독이 안 돼 위생 상태가 나쁜데다 목욕도 할 수 없는 조건에서 시간이 지나자 이주민들의 옷과 머릿속에는 이가 득실거렸다. 정차 역에 열차가 서면 사람들은 플랫폼으로 나와 머리를 털었는데 이가 먼지처럼 쏟아져내렸다.

면역력이 약한 유아들이 제일 먼저 병에 걸렸다. 곧이어 노인들이 몸져누웠다. 경비원들이 병자를 발견하면 치료 뒤 가족에게 보내주겠다며 전염병 확산 방지를 빌미로 데려갔다. 이렇게 실려간 환자들은 다시 가족을 만날 수 없었다. 나중에는 이주민들이 병이 깊어도 내색하지 않았다. 죽어도 가족 품속에서 죽겠다는 각오였다.

병을 얻은 대다수 사람들은 살아서 땅을 밟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이주민들의 불만이 높아졌고 당연히 대표를 꾸려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우리 한인들이 혁명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스탈린 동지가 이런 대우를 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소. 당에 우리의 처지를 전달해주시오.” 이런 항의를 받은 내무인민위원회 간부는 일단 의견을 접수하겠다고 대표들을 남기고는 열차 운행은 지체할 수 없다며 열차를 떠나보냈다.

“러시아·중앙아시아 전역에 묻힌 부모·형제”
한인 강제이주 여정의 마지막 분기점이었던 노보시비르스크역에서 87년 전 눈물을 삼키며 열차에 올랐을 한인들을 떠올렸다.

한인 강제이주 여정의 마지막 분기점이었던 노보시비르스크역에서 87년 전 눈물을 삼키며 열차에 올랐을 한인들을 떠올렸다.

가족에게 뒤차로 곧 따라가겠다는 남은 이들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에게 닥친 운명은 총살이었다. 이어서 큰 역에 도착할 때마다 내무인민위원회 특무들이 한인 중 과거에 소비에트 및 당 기관에서 일했던 남자들을 색출해 잡아갔다. 이렇게 잡혀간 이들은 누구보다 볼셰비키와 인민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던 한인 혁명가였다. 모두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기적 소리가 들리는 벌판에서 한 많은 생을 접어야 했다.

한인 혁명가 김아파나시(김성우)는 러시아 이주 한인 2세였다. 우수리스크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17살 김아파나시는 1917년 러시아혁명을 맞았고 이에 영향받아 고려인 학생서클을 조직해 혁명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1920년 볼셰비키 당원이 되고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서는 레닌과 이동휘의 회담 때 통역을 맡기도 했다. 1934년에는 소련공산당 제17차 당대회 대표로 선발됐고 최고 훈장인 레닌훈장을 받았다.

이런 김아파나시가 1936년 1월 열차에서 내린 직후 블라디보스토크역 승강장에서 내무인민부원들에게 체포됐다. 김아파나시는 반혁명 활동과 일본군의 밀정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판결문은 간단했다. “김아파나시 아르센지예비치를 사형에 처한다. 판결은 최종적이며, 소련중앙집행위원회의 1934년 2월1일부 결정을 근거로 하여 판결을 그 즉시로 집행할 것.”

형이 집행된 사실은 김아파나시의 아내 유예카테리나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유예카테리나는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돼 교사 생활을 하면서 남편을 기다리다 1971년 사망했다. 김아파나시에 대한 판결은 1989년에야 뒤집어진다. 소련최고재판소 군사법원 서기국은 김아파나시가 죄 없이 유죄 선고를 받았으므로 기소를 취소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나를 가슴 아프게 했던 것은 김아파나시의 아들 김텔미르의 증언이었다. “나의 부친은 하바롭스크에 묻혀 있다. 어머니는 (러시아) 크림주 옙파트라시에, 외할아버지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주 미르자촌에, 친할아버지는 연해주 수하놉카촌에, 외할머니는 타슈켄트주 사마르스코예촌에, 그리고 친할머니는 카자흐스탄의 침켄트시에, 형님은 연해주 크라스키노촌에 안치돼 있다. 그러니 이 고인들을 누가 모셔서 성묘를 할 것인가. 기가 막힌다.” 한인 한 사람의 부모·형제들 무덤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전역에 고루 퍼져 있다. 한인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이처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 또 어디 있으랴.

소련 당국이 극동에 퍼진 수십만 명의 한인을 강제이주하는 일을 재촉하다보니 열차 사고도 일어났다. 1937년 11월 초순 하바롭스크 베리노역에서 한인 이주민을 태운 505열차가 충돌 사고를 일으켜 기관차 쪽에 연결된 객차 7량이 전복됐다. 이 사고로 한인 21명이 죽었고 50명이 중상을 입었다.

1살 남자아이 최표도르, 4살 꼬마 남동희, 6살 여자아이 김바르바라, 16살 소녀 김예카테리나, 김예카테리나의 친구였을 동갑의 박유라 같은 한인 아이들이 사망자 명단에 포함됐다. 극동을 출발한 강제이주 열차가 목적지인 중앙아시아에 도착할 때까지 40여 일이 걸렸다고 한다. 현대식 열차로 달린 3박4일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 구간조차 힘겨워했던 나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여정이다.

낯선 얼굴 마주 보며… 기차여행의 묘미
노보시비르스크 외곽 세이텔 마을로 달리는 열차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

노보시비르스크 외곽 세이텔 마을로 달리는 열차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

강제이주 여정의 마지막 분기점이었던 노보시비르스크역. 나는 87년 전 눈물을 삼킨 표정으로 열차에서 내렸을 한인들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한인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혹사당했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가며 눈물의 열차를 탔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는 땅은 생전 처음 보는 황량한 중앙아시아의 벌판이었다. 참으로 가엾은 운명을 짊어진 사람들이었다.

노보시비르스크역의 짐 보관소는 유럽 각지에서 온 배낭여행객들로 북적였다. 어느덧 서쪽으로 많이 들어와 있음을 실감했다. 역사 밖으로 나오니 큰 광장이 여행자들을 맞이했다. 어떻게든 여행자들의 주머니를 털 생각에 상업시설로 둘러싸 코딱지만 한 광장만 내놓은 한국의 여러 역들처럼 숨이 막히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을 잃고 절망 속에 발을 디뎠던 78년 전의 한인들에겐 넓은 광장이 황량한 사막과 다를 바 없었으리라.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찾아가기로 한 방문지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광장 한쪽에 있는 매점에서 시내 지도를 샀다. 그러나 지도에서 목적지를 확인할 수 없었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분명했다. 길을 묻는 수밖에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서의 시도는 실패했다. 상인들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낭패감에 택시를 잡을까 고민하던 때에 조금 전 물어봤던 상인 중 한 명이 다가와 역으로 가라고 했다. 노보시비르스크역 광장 오른쪽 끝에 교외선 전용 역이 있었다.

역 창구로 가서 철도박물관으로 가는 차표를 끊었다. 철도박물관은 노보시비르스크 외곽 세이텔 마을에 있었다. 전자식 게이트에 종이 표의 바코드를 대니 칸막이가 열렸다. 승강장에는 휴일을 맞아 교외로 놀러 가는 청소년과 주민이 뒤섞여 왁자지껄한 풍경을 연출했다. 교외선 전철에 올라타 자리를 잡았다.

운이 좋게도 맞은편에 예쁜 아가씨가 앉았다. 한국에 두고 온 딸아이 또래의 귀여운 아가씨와 나는 눈으로만 대화를 나눴다. 서로 미소를 가득 담은 얼굴로 마주 보며 차체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는 것도 기차여행이 주는 묘미이리라.

카메라를 들어 소녀에게 초점을 맞췄다. 뷰파인더 안의 소녀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지만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창밖을 보면서도 내 쪽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25년쯤 젊었으면 여행을 포기하고 를 찍었겠지만 이미 뱃살이 무거운 몸이다. 밤새 걸으며 설레는 사랑을 하기에는 약간 늦었다. 열차는 어느덧 세이텔역에 다 와갔다.

나는 내리면서 휴대용 포토 프린터로 인쇄한 소녀의 사진을 건네주었다. 아웃포커싱으로 한껏 폼을 낸 사진을 받아든 소녀는 기쁨과 놀람이 가득 담긴 웃음 때문에 크게 벌린 입을 손으로 가린 채 “스파시바”(고맙습니다)를 연발했다. 노보시비르스크역에서 세이텔역까지는 1시간 가까이 걸렸다. 택시를 잡았더라도 요금을 흥정하다가 발길을 돌렸을 거리였다.

세이텔 철도박물관이 품은 숱한 사연
옛 소련 시절 운행됐던 기차가 전시된 세이텔역 철도박물관.

옛 소련 시절 운행됐던 기차가 전시된 세이텔역 철도박물관.

세이텔역은 작고 아담했지만 지은 지 얼마 안 됐는지 깨끗하고 주변의 풍경과 잘 어울렸다. 건설사들을 기쁘게 해주려 했는지 규모만 웅장하고 기능성은 떨어지면서 모양은 천편일률적인 공산품 같은 한국의 신설 역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역에서 내려 육교를 건너면 바로 철도박물관이 있다. 세이텔역의 한쪽 선로 쪽이 철도박물관 부지인 셈이었다.

박물관 입구에는 조지 스티븐슨이 만든 최초의 상용 기관차인 로켓호의 모형이 전시돼 있었다. 아이들이 모형 위에 뛰어올라 노는 모습이 귀여웠다. 아이들에게 기차만큼 친한 친구가 또 어디 있으랴. 천국행 열차도 아이 마음이 있어야 탈 수 있다는 2천여 년 전 예언자의 말은 틀리지 않으리라.

철도 덕후에게는 테마파크보다 더 신나는 공간이 철도박물관이다. 세이텔역의 철도박물관에는 옛 소련 시절에 운행됐던 기차들이 전시돼 있었다. 붉은 별을 머리에 단 증기기관차는 기본이고 겨울왕국답게 기관차 앞에 커다란 삽을 장착한 제설차, 대포를 실은 군용 화차, 심지어 쇠창살을 설치한 죄수 호송용 객차까지 다양한 기차의 실물이 전시돼 있었다. 발이 부르트도록 전시된 기차들을 둘러본 뒤에야 박물관을 나섰다. 노보시비르스크역으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박물관에 전시된 열차들이 실제로 달렸을 시공간과 그 속의 사람들이 겪었을 숱한 사연은 또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생각했다.

노보시비르스크역에 도착해 광장에서 지하로 연결되는 입구를 따라 내려가 지하철을 탔다. 노보시비르스크의 지하철은 2개 노선이 있다. 노보시비르스크역에서 ‘제르진스카야선’이라고 부르는 녹색의 2호선을 타고 한 정거장을 가면 ‘레닌스카야선’인 붉은색의 1호선으로 환승할 수 있다. 서울지하철의 1·2호선과 동일한 노선 구분 색이다. 환승 뒤 한 정거장을 더 가 레닌 광장에서 내렸다.

노보시비르스크의 레닌 광장은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큰 레닌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이전에 방문했던 도시들과 다른 점은 레닌이 홀로 서 있는 게 아니라 양옆으로 5개의 거대 석상이 함께 서 있었다. 혁명을 향해 전진하는 3명의 전사는 레닌의 오른쪽에 서 있었고 사회주의의 희망을 말하는 듯한 남녀 시민은 왼쪽에 서 있었다. 그 웅장함이 광장을 압도했다.

노보시비르스크는 러시아혁명 이후 시베리아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시베리아 최대의 공업도시로 탈바꿈했다. 시에서 30km 떨어진 곳에 조성된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는 냉전 시절 러시아가 미국과 견줄 과학 기술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던 연구단지이기도 하다. 그만큼 러시아와 혁명에 대한 자부심을 내세울 수 있는 도시의 광장이었기에 거인 같은 석상들로 레닌 광장을 조성했으리라.

광장으로 놀러 나온 시민들은 뜨거운 태양을 피해 거대한 석상이 만들어낸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었다. 석상들의 경건한 표정과 그 아래 소인국의 시민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오후의 나른한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의 얼굴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보호대를 착용한 금발 소녀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거인들을 터닝포인트 삼아 도는 동안에도 혁명 거인들은 곁눈질 하나 없이 먼 하늘만 쳐다보았다.

자작나무숲이 춤추는 횡단열차로 퇴근

하루 종일 도시를 탐방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열차에 올랐다. 이제 횡단열차에 오르는 것은 하루를 열심히 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노동자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저녁 6시2분발 예카테린부르크행 37열차 3등칸으로 퇴근을 했다. 객실 탁자 위에 저녁을 차렸다. 반찬 겸 안주인 참치캔을 따고 보드카도 꺼냈다. 창밖에 자작나무숲이 춤추는 근사한 레스토랑이 열렸다. 또 서쪽으로 20시간을 달려야 한다.

글·사진 박흥수 기관사·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 객원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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