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쿠츠크로 가는 동안 북쪽 일행 중 유독 한 사람은 남쪽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이는 더위 속에서도 맨몸을 드러내거나 러닝 차림으로 다니지 않았다. 북한 승객들은 마른 몸이었지만 혼자서만 배가 나온 것도 다른 점이었다. 이 사람이 일행의 책임자로 보였다. 고위급 인사들은 2등칸에 타고 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마도 3등칸 인솔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울란우데역에 도착하기 전, 시골 역에서였다. 나는 육교 위에서 망원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로 역의 이곳저곳을 담고 있었다. 이때 뷰파인더에 평소와는 다른 모습의 북한 일행이 보였다. 역의 한적한 담벼락 모퉁이에서 북한 노동자들이 둘러싼 가운데 한 사람 앞에 여러 명이 고개를 숙이고 혼이 나는 광경이었다.
“그동안 찍은 사진 좀 지워주시라요”울란우데를 떠난 뒤 찾아온 북쪽 친구는 매우 미안해하면서 부탁을 해왔다. 그동안 함께 찍은 모든 사진을 지워달라고 했다. 그것도 알아서 지우라는 것이 아니라 메모리카드를 재생시켜 눈앞에서 지우라는 것이었다. 남쪽 일행은 토를 달지 않았다.
착잡한 마음으로 지난 사진들을 열었다. 열차 안과 역에서 어깨동무를 하거나 환한 웃음으로 렌즈를 향했던 얼굴들이 나타났다가 삭제 버튼에 눌려 사라졌다. 지우다보니 꽤 많은 사진을 찍은 것을 알았다. 북쪽 친구들은 메모리의 사진들을 다시 확인하고는 몇 번이나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거의 모든 사진이 지워졌지만 몇 장은 남길 수 있었다. 무선 사진 전송 기능이 있는 카메라였기에 때때로 휴대전화 메모리로 옮겨놓은 덕분이었다.
규칙적인 열차의 소음에 몸이 적응되면 그 소음 속에 적막이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무음 모드의 화면을 보는 듯 머리를 기댄 차창 밖의 풍경만이 시선을 붙든다. 인간의 뇌는 신기한 물질이다. 생각에 골똘하면 굉음 속에서도 고요를 느낀다.
이런 내 몸을 깨운 것은 거대한 호수였다. “와우!” 몸을 일으켜 스파이더맨처럼 차창에 달라붙었다. 낮잠을 즐기던 남쪽 일행을 깨웠다. 어느새 나타난 호수는 떡하니 수평선을 내어놓고 있었다. 바이칼이었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멍한 표정으로 밖을 보는 친구 역시 끝없이 펼쳐진 망망 호수의 위엄에 넋을 잃었다. 객차 안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승객들은 호수가 보이는 창가 쪽으로 몰렸다. 경상남·북도를 합한 크기로 세계에서 가장 깊고 아시아에서 가장 넓은 호수다. “어떤 날은 종일 보리밭 사이를 달리다가, 또 어떤 날은 호수를 끼고 한없이 달리기도 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랐던 손기정의 증언이다.
손기정이 한없이 달린 호수가 바로 바이칼이었다. 현지 적응 훈련을 위해 본진보다 일찍 도쿄를 출발한 일본 마라톤 대표팀의 손기정은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경부선을 타고 서울역에 도착해 경의선을 달려 만주로 가는 국제열차로 갈아탔다. 치타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야 했는데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정규 열차편 시간이 맞지 않아 화물열차를 탔다.
화물열차에 몸을 싣고 고단한 여정을 견뎌낸 식민지 청년은 베를린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마라톤 대표팀을 마중 나온 베를린 주재 일본대사관 직원이 왜 조선인이 두 명이나 끼었느냐며 화를 냈기 때문이다. 손기정은 보름이나 열차 안에서 시달렸는데 일본대사관 인사의 응대를 접하고 나니 왈칵 울음이 나오는 걸 참았다고 했다.
차창 밖 바이칼 나타나자 여기저기 ‘탄성’1936년 8월9일, 베를린올림픽 스타디움의 마라톤 결승선을 최초로 통과한 24살의 젊은이는 신발부터 벗어던졌다. 작은 운동화로 인해 달리는 내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마라톤 경기가 끝난 뒤의 표정으로만 본다면 이날의 우승자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2위를 한 영국인 어니스트 하퍼였다. 세계신기록까지 세우며 1위를 한 손기정과 3위의 남승룡은 웃지 않았다.
10만 관중이 운집한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시상식이 열렸다. 히틀러가 손기정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주었다. 일본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손기정은 얼굴을 숙였다. 우승자에게만 주어지는 월계수로는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다. 일본인들과 체육협회는 분노했고 이후 모든 육상경기에서 손기정의 출전을 금지했다. 대일본제국 만세를 불렀던 조선인들이 떵떵거리던 시대였다. 청년 손기정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가 이룬 엄청난 성취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청년은 가슴에 달지 못한 조국의 깃발이 한스러웠다.
바이칼 호숫가는 바다처럼 파도가 밀려왔다. 열차는 호수가 연출하는 황홀한 풍광을 끼고 달렸다. 아직 이르쿠츠크까지는 3시간도 더 남았는데 사람들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만큼 모두들 내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침대 매트리스의 시트와 베갯잇을 벗겨 차장에게 반납했다. 차장실 앞 바구니에는 승객들이 반납한 시트가 가득 쌓여 있었다. 3일 밤을 누워 지낸 두꺼운 매트리스를 말아서 침대 한쪽에 몰아넣으니 곧 목적지에 도달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배낭을 정리하는 중에 노어 회화책을 바꿨던 재석 청년이 허리춤을 살짝 잡았다. 따라오라는 눈짓이 보였다. 둘은 흡연실로 사용했던 객차 연결 통로의 좁은 공간에 마주 섰다. “박 선생님!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 이거 받으시라요.” 재석 청년은 웃옷 속에 숨겨온 물건을 내놓았다. 나와 교환했던 러시아어 회화책이었다. 내가 말을 하기 전에 재석 청년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제가 드린 노어 회화책을 돌려달라는 것은 아닙네다. 사나이가 그럴 순 없지요.” “정말 갖고 싶어 했잖아요. 나랑 바꾼 뒤에도 열심히 보는 거 봤어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자세한 사정은 묻지 마시고 제 책만 기념으로 잘 간직해주세요.” “왜요? 자본주의 사상 물든 남조선 책 갖고 있으면 당성이 떨어진대요? 지난밤부터 그쪽 분들 분위기가 좀 이상해진 거 알고 있어요. 남조선 사람한테 돌려줬다고 하고 그냥 몰래 쓰세요.”
재석 청년은 뜻 모를 웃음을 지은 뒤 말했다. “일없습니다.” “그럼 재석씨 갖고 있던 노어 책 돌려줄게요. 잠깐 기다려요.” “박 선생님! 제 자존심 밟고 가시려면 돌려주시라요.” 어이없는 한숨을 내쉬는 나를 보고 재석은 씩 웃은 뒤 몸을 돌렸다. “그럼 저 먼저 돌아가겠습네다.” “잠깐만요, 재석 동무!” 4일간 같이 달려온 북의 청년이 몸을 돌렸다.
나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3년간 아프지 말고, 절대 위험한 일 무모하게 나서지 마요. 안전장구 귀찮아하지 말고, 돈 많이 벌어서 평양의 아내와 아기 만나야죠!” 우리는 악수를 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목을 풀어 서로의 팔뚝을 잡았다. “여행 잘 하시라요! 조국 통일되면 만날 수 있갔지요.” 재석 청년은 먼저 객실로 돌아갔다. 먹먹한 가슴을 다스리기 위해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냈다. 독한 담배였으면 했는데 순한 남한 담배가 나왔다.
레닌 동상·길고양이 만나면 ‘깍듯이’살림살이를 모두 챙겼다. 고스란히 남은 5ℓ들이 새 물통과 컵라면 하나를 며칠을 더 가야 하는 옌볜 조선족 아주머니한테 전달했다. 북한 노동자들은 번듯한 정복 모드로 변신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왼쪽 가슴에는 옛 지도자들의 얼굴이 든 배지가 달려 있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북쪽 친구에게 배지를 가리키며 혹시 남는 게 있으면 내가 가진 물건과 바꾸자고 했다. 그러고는 바꿀 게 무엇이 있을까 생각했다. 한때 노동조합에서 시민들에게 나눠준 철도 민영화를 반대하는 배지라도 가져올걸 하는 후회를 했다. 이때 맞은편 친구가 어디다 감히 손가락질하느냐며 얼굴을 붉혔다. 존경하는 지도자 동지 배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은 큰 불경이었다. 두 손으로 공손히 손바닥을 펴서 가리켜야 했다. 장군님 배지는 함부로 누구와 바꾸는 것이 아니라는 훈계도 들었다. 이 모양을 지켜보던 남쪽 일행도 장난기 섞어 나를 꾸짖었다. 나는 북쪽 친구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우리는 이후 여행하면서 레닌 동상이나 길고양이를 만나면 두 손을 한쪽으로 모아 45도 들어 가리켰다. 절대 존엄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열차가 서행하며 이르쿠츠크역에 도착할 기미를 보이자 남북 노동자들은 서로 작별 인사를 했다. 통일이 되면 꼭 만나자고 다짐했다. 부질없는 기약이 아니기를 바랐다. 승강장에 내리니 다른 칸에 탔던 북한 노동자들도 다가왔다. 아쉬운 웃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승객들은 수감시설에서 석방된 기분으로 역사를 빠져나왔다.
역 앞은 트램 노선이 중앙으로 지나는 도로가 있었다. 20~30명의 소그룹으로 나뉜 노동자들이 가방을 땅에 내려놓고 자신들을 태우고 갈 차량을 기다렸다. 그중에는 중국인 그룹도 있었다. 승합차 한 대가 열댓 명의 사람을 태운 뒤 사라졌다. 북한 노동자들은 오랜 여행에 지친 피곤한 얼굴로 미지의 땅으로 데려갈 누군가를 기다렸다.
역 밖으로 나오자마자 짐을 맡기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10루블, 200원이 약간 넘는 돈을 주고 터지기 직전에 이른 방광의 압력을 해소했다. 여유를 되찾은 나는 역의 우편취급소를 찾았다. 역사의 한쪽 끝에 있었다.
1925년 6월17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90년 전에 나의 여정과 똑같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를 타고 이르쿠츠크에 내린 이가 있었다. 박철환이라는 이름의 27살 조선 청년이었다. 그는 1시간가량의 정차 시간 동안 이르쿠츠크역의 우편취급소에서 자신의 모스크바 도착 시간을 알리는 전보를 쳤다.
박철환의 옷소매 안감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완전한 타도,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제1강령으로 하는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한 사람들이 서명한 파견대표 위임장이 재봉돼 있었다. 두 달 전인 4월17일, 경성 황금정(을지로)의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이 결성됐다. 박철환은 이 사실을 모스크바에 있는 국제공산당 본부에 알리기 위해 대표로 나선 길이었다.
여행 책과 다른 친절한 러시아 사람들나는 부모가 베이비붐에 편승한 나머지 내 의지와 무관하게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이때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들이 현재 담고 있는 뱃살만큼 무용담이 넘쳐난다. 불의를 못 참는 지사였고 시국을 들었다 놨다 한 혁명가였다. 당시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 중엔 ‘언더’라고 불렀던 지하서클에 가입한 이도 있었다. 이들은 가명을 한둘씩 가지고 있었다.
나 역시 어쩌다 그런 그룹에 끼었다. 뭐 당연히 가명을 만들기는 했지만 내가 들었다 놨다 한 것은 주로 술잔이었다. 지하조직에서 가명을 만들 때 뻔히 유추가 가능한 이름들, 예를 들면 민중혁명의 줄임말인 민혁 같은 이름을 고르는 것은 금기였다. 이런 면에서 박철환이란 이름은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다. 철환이란 강철탄환이란 말이다. 조선 해방의 강철총탄이 되어 날아가겠다고 다짐한 배포 큰 청년은 누구였을까? 바로 죽산 조봉암이다.
3·1운동은 조봉암의 삶을 바꿔놓았다. 식민지 극복을 위해 조봉암이 선택한 것은 공산주의였다. 해방 정국에서는 미국과 소련에 기대는 정치세력을 비판하며 자립적 조선 건설을 주창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노선을 따르는 좌익세력도 비판했다. 한국전쟁 이후인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은 이승만과 맞붙어 30%의 득표율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승만 정권과 국가보안법이 진보당의 기치를 내건 조봉암을 그냥 두지 않았다. 1959년 대한민국 법원은 간첩 혐의를 걸어 사형을 선고했다. 형은 서둘러 집행됐다. 진보의 뿌리는 무참히 짓밟혔다. 근대를 지나오는 세월 속에 많은 이들이 어이없이 살해됐다. 그중에서도 안타까운 것은 쭉정이 같은 이들이 거목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사람들을 해친 것이다.
지도를 펼쳐들고 인터넷으로 예약한 게스트하우스를 찾아나섰다. 길 찾는 데는 자신이 있었지만 4일간의 열차 수감 생활로 지친 탓에 길을 잘못 들었다. 구글 지도 앱은 우리의 위치와 목적지가 꽤 멀리 떨어져 있음을 표시해줬다. 앱만 의지할 수도 없었다. 기껏 앱이 알려준 목적지가 틀린 경험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에 비까지 오락가락했다. 일행의 말투에 슬슬 짜증이 섞이기 시작했다. 마주치는 사람에게 길을 묻기로 했다. 지도와 주소를 보여주면 열심히 설명해주는데 우리 일행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저마다 유추한 해석도 달랐다. “저 아줌마는 이쪽 길로 가라고 한 거야!” “건너편에서 우회전하라고 한 게 아니고?” “왔던 길로 다시 가라는 것 같았는데.”
5일 만에 팬티 갈아입으니 ‘아름다운 인생!’여러 번의 시도 끝에 초급 영어 구사가 가능한 고등학생 남녀를 만났다. 남자아이의 이름은 알톤이었다. 내가 보여준 지도와 스마트폰의 지도 앱을 한참 보더니 근처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서 스마트폰을 들고 나왔다. 알톤이 러시아 지도 앱을 켜고 기꺼이 앞장을 섰다. 우리는 뒤에서 앞에 선 남녀가 남매일까 커플일까를 조용히 말했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어차피 한국말을 모를 테니까.
알톤의 안내를 따라 거의 20분을 걸었다. 알톤이 아니었으면 우리 일행은 2시간쯤 헤맨 끝에 서로 멱살을 잡고 다투다 다음날 귀국했을지 모른다. 적지 않은 여행 안내서에 소개된, 러시아 사람들이 웃음이 없고 불친절하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마침내 이르쿠츠크 후미진 동네의 맨션아파트 1층을 임대해 영업하는 호스텔에 도착했다. 진동하지 않는 널찍한 침대, 물이 콸콸 쏟아지는 샤워기와 욕조, 냄새 없는 하얀 변기…. 오, 인생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드디어 5일 만에 팬티를 갈아입었다.
글·사진 박흥수 기관사·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 객원연구위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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