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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목소리가 그립다

빌리 브란트와 함께 냉전의 광기를 이성으로 관통한 ‘오스트폴리티크’(동방정책)의 머리 에곤 바르
등록 2015-08-25 20:00 수정 2020-05-03 04:28

초대형 확성기를 사이에 두고, 겁먹은 군인들이 서로에게 총질을 해댄다. 한 번도 싸워본 일 없는 입에선, ‘전쟁불사론’이 쉽게도 튀어나온다. 메마른 들판에 불씨가 떨어지면, 삽시간에 선산을 집어삼키는 법이다. 바람이, 제법 거세게 불고 있다. 이성의 목소리가 그립다.
“은행 따위나 국유화하려고 사회민주당(사민당)에 입당한 건 아니었다. 아니, 사민당에 입당한 건 기독민주당(기민당)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통일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진정성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민당 지도자 쿠르트 슈마허는 진심으로 통일을 원했다. 나는 독일이 언젠가는 반드시 통일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확신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고….”(2005년 4월29일치 인터뷰 중에서)
빌리 브란트의 평생을 함께한 친구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에겐 그가 있었다. 외로웠을 말년, 브란트는 이런 질문을 받았다. “평생을 함께한 당신의 친구들은 누구인가?” 질문은 ‘복수’였지만, 대답은 ‘단수’였다. “에곤.” 1960년부터 그림자처럼 그의 곁을 지켰던 동지인 에곤 바르를 일컬은 게다. 브란트와 바르는 냉전의 광기를 이성으로 관통한 ‘오스트폴리티크’(동방정책)의 몸통과 머리였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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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카를하인츠 바르는 1922년 3월18일 독일 중동부 소도시 트레푸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교 교사였고, 어머니는 유대계였다. 그가 태어나기 1년 전 창당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은 그의 나이 11살 때인 1933년 집권에 성공했다. 바르는 2013년 6월20일 (DW)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히틀러가 독일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갈 것이라고 걱정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 때 전세계 대표단이 히틀러에게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것을 보면서 크게 실망하기도 하셨다.”

바르의 부친은 교직에서 내처졌다. 친정어머니가 유대계인 ‘반쪽 유대인’ 부인과 헤어지라는 당국의 명령을 거부한 탓이다. 가족은 고향을 떠나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는 8월21일치에서 “고교를 졸업한 바르는 애초 음대에 진학하고 싶어 했지만, 어머니가 유대계란 이유로 입학이 불허됐다”고 전했다. 1939년 9월1일 그예 전쟁이 터졌다. 개전 초기, 바르는 ‘양가감정’에 시달렸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삽시간에 폴란드와 프랑스를 점령했다. (독일 황제) 카이저도 못했던 일이다. 그러곤 소비에트로 진격해 들어갔다. 나폴레옹도 실패했던 일이다. 독일인으로서 묘한 자부심을 느꼈다. 반면 나치의 승리는 우리 가족의 절멸을 뜻했다. 어머니 쪽 7남매 가운데 5명이 가족과 함께 베를린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다. 발각됐으면 목숨을 잃었을 텐데, 다행히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두 무사했다.”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바르는 1942년 징집됐다. 공군 장교 후보생이 됐지만, 어머니가 유대계란 사실이 드러나자 사병으로 강등됐다. 1944년 4월 군문을 나선 바르는 군수공장으로 복귀했다. 그 무렵 그의 아버지는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있었다.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돕지 않는다”

1945년 1월 중순 소련의 ‘붉은 군대’가 독일 전선에 투입됐다. 그해 4월 초부터 베를린에서 전투가 불을 뿜었다. 히틀러는 그달 30일 자살했다. 전쟁은 곧 끝났다. 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바르는 등을 거쳐 미국 정부가 점령지에서 운영한 <rias>에서 활동했다. 그가 사민당에 입당한 것은 1956년의 일이다.
1957년 10월3일 빌리 브란트가 서베를린 시장에 취임했다. 본명은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 브란트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노르웨이·스웨덴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쓰던 가명이다. 브란트 역시 기자 출신이기도 했다. 그는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 종군기자로 활약한 바 있다. 바르는 1960년부터 브란트가 서독 외교장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1966년까지 서베를린 시정부 공보실장 겸 대변인으로 일했다.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은 동독이 이른바 ‘반파쇼 방어벽’ 건설을 전격 시작한 것은 1961년 8월13일이다. 미국과 영국 등 동맹국 정부는 ‘도발’에 침묵했다. ‘베를린장벽’은 그렇게 냉전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장벽 사태’를 겪으며 바르는 “우리가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 독일인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로부터 2년여 뒤인 1963년 7월15일 바르는 남부 바이에른주 소도시 투칭의 기독아카데미에서 이른바 ‘접근(화해)을 통한 변화’를 뼈대로 한 동방정책의 얼개를 제시한다. 그는 이렇게 강조했다. “통일이란 역사적인 날에, 역사적인 회담에서, 역사적인 결정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일회적인 일이 아니다. 수많은 조치와 수많은 정류장을 거쳐야 가닿을 수 있는 과정이다.”
냉전의 장벽은 굳건했다. 한 번에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하다. 어찌할까? 좀더 성기게 만들기만 해도 좋겠다. 장벽을 통해 사람(통행)과 물자(통관)가 드나들고, 소식(통신)이 전해져야 한다. 이른바 ‘3통’이다. 브란트와 바르는 작은 발걸음이 큰 변화를 불러올 것을 확신했다. 서베를린의 120만 시민이 성탄절과 부활절에 맞춰 동베를린의 친지를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그런 노력의 하나였다.
1966년 브란트는 외교장관이 됐다. 바르는 외교부의 기획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69년 브란트가 서독 총리가 됐을 때, 바르는 비서실장 겸 정무장관으로 그의 곁을 지켰다. 바르는 부지런히 정책을 만들었고, 브란트는 하나씩 이를 현실로 옮겼다. 반나치 투쟁을 벌인 브란트의 경력은 동구권에 다가서는 데 도움이 됐다. 시장으로서 고립된 베를린을 지켜낸 브란트의 경험은 서구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퍼주기론’은 반발이 왜 없었을까?
동·서독의 국경을 인정하는 대신, 통독 과정에서 독일인이 주도권을 행사하기로 한 ‘모스크바조약’(1970년 8월)이 시작이었다. 독일-폴란드 국경선을 인정하고 상호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뼈대로 한 ‘바르샤바조약’(1970년 12월)으로 동구권과 화해의 물꼬를 텄다. 1971년 9월엔 동·서독을 에워싼 4대 강국인 미-영-프-소 사이에 ‘베를린협정’이 체결돼, 본격적인 ‘데탕트’(화해·긴장완화)의 서막을 알렸다.
‘4자’ 다음은 양자였다. 두 독일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통일로 나아기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기본조약’에 1972년 12월 합의했다. 이로써 ‘2+4 체제’(동·서독 + 4강)가 완성됐고, 이후 ‘독일 문제’의 주도권은 독일인이 쥐게 됐다. 이 모든 협상을 물밑에서 이끌어낸 건 바르였다.
‘퍼주기론’ 따위 반발이 왜 없었을까? 기민당 쪽에선 대놓고 바르에게 ‘반역자’란 낙인을 찍기도 했다. 사민당 내부의 반발과 연정 파트너였던 자유민주당의 이탈까지 겹치면서 브란트는 불신임 투표까지 견뎌내야 했다. 1974년 5월 브란트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보좌관이던 귄터 기욤이 동독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바르도 공직에서 사임했지만, 브란트의 후임인 헬무트 슈미트의 권유로 경제협력부 장관을 2년여 더 수행했다.
요지부동이던 베를린장벽은 1989년 11월9일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두 사람이 초석을 쌓은 통독의 기쁨은 헬무트 콜이 이끄는 기민당 정부가 누렸다. 바르는 18년간 활동해온 연방의원직에서 1990년 물러났다. 브란트는 1992년 10월8일 숨졌다. 베를린으로 자리를 옮긴 사민당 중앙당사는 ‘브란트하우스’로 불린다. 그 건물 한 귀퉁이 사무실에서 바르는 최근까지도 연구·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에곤 바르는 지난 8월20일 잠자리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향년 93. 그는 2005년 4월29일 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루고자 했던 모든 일이 세월과 함께 현실이 됐다. 우리의 생각이 바뀐 결정적 계기는 장벽이었다. 1961년 장벽이 세워졌을 때, 우리는 알게 됐다. 모두가 장벽이란 현실에 만족했다. 아무도 현상을 바꾸는 걸 원치 않았다. 장벽에 작은 구멍 하나 내거나, 그걸 통과하려는 노력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이 모든 건, 그렇게 시작됐다.”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r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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