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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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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있어야 할 곳

아시아·아프리카 국가 모여 식민주의 종식·민족자결 외친 정치 축제장이었던 반둥회의… 국제정치의 축제가 된 60주년 기념식에 관심 한 톨 두지 않는 한심함
등록 2015-04-29 19:27 수정 2020-05-03 04:28

정치 지도자의 권력 유지는 신화적 이미지와 결합된 정책 성공이 관건이다. 하지만 권력자의 몰락은 자신이 등장해야 할 곳과 때를 놓치면서 시작된다. 지난 며칠 한국의 최고 권력자는 ‘대통령의 시간과 장소’를 이중으로 놓쳤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한국 사회가 다시 한번 신음하며 몸서리를 치고, 정치 참극을 맞아 온 나라가 진절머리와 넌더리를 내고 있을 때 그는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 대륙으로의 유람 내지 유랑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내팽개친 또 하나의 시간과 장소는 지난 4월22~24일 열린 반둥회의 60주년 기념식이었다.

어찌 매번 골든타임을 비켜가나

1955년 4월18~24일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아시아 23개국과 아프리카 6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모여 식민주의 종식과 민족자결 및 국제 냉전의 군사동맹 질서 편입에 반대하는 ‘비동맹 원칙’을 발표했다. 그 60주년을 맞아 올해는 같은 장소에서 아시아·아프리카 106개 국가와 16개 참관국 및 25개 국제기구의 정상과 대표들이 참석했다. 그들은 ‘반둥회의’의 정신을 새기며 21세기 아시아·아프리카 평화 연대의 의미를 찾고 경제협력의 필요를 다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우리 국민과 동감·동고도 못하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과 동감·동행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허황되다. 그렇더라도 대통령이 정치적 ‘골든타임’(golden time)과 ‘최적지’(best place)를 이렇게 매번 비켜가는 것을 보기란 참혹하기 그지없다. 총리는 ‘식물’이고 대통령은 ‘동물’이 되어버린 나라에서 사람으로 살며 현실을 버티기도 팍팍하고, 4월과 5월이면 우리 역사와 관련해서 기억하고 기념할 일들이 태산처럼 무겁고 별처럼 쏟아진다. 하지만 반둥회의의 역사적 의의와 현실적 함의를 더듬는 것은 다른 어떤 곳보다 한반도 주민들에게 더 중요하다. 탈식민과 탈냉전이라는 엄중한 과제가 우리 앞에 떡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기념식에서 일본 총리 아베가 ‘전쟁에 대해 반성’하지만 식민지배와 침략을 사과하지 않은 것에만 초점을 맞춰 반둥회의가 지닌 더 큰 의미와 함의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60년 전 반둥의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는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가 개회식에서 말한 대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종 대륙 간 회의”였다. 지구는 백인들이 그저 손을 까닥거리며 마구 발을 휘젓는 곳이 아니라 무엇보다 갈색·흑색·황색의 유색 주민들이 함께 웃으며 어깨를 겯는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당시 인류의 절반 이상을 대표하는 지역과 국가들의 정치 지도자들을 ‘회의에서 춤추게’ 한 것은 식민주의 종식과 민족자결이라는 ‘감정의 코뮤니타스(공동체)’였다.

반둥회의는 일종의 정치 축제였다. 수도 자카르타가 아니라 반둥이 회의 장소로 선정된 것부터 특별했다. ‘열대 속 유럽’이라 불린 반둥은 쾌적한 기후와 환상적인 자연환경에 더해 네덜란드에 대항한 반식민운동의 역사적 전통까지 갖췄다. 그곳에서의 국제회의는 참석자들에게 그동안의 험난한 민족 독립운동과 해방투쟁에 대한 보상 선물 같은 것이었다. 수카르노는 회의 장소를 ‘게둥 메르데카’(자유의 건물)라고 새로 이름을 붙여 참석자들을 맞이했다. 참석자들 또한 기꺼이 그 축제에 공연자로 뛰어들었다. 회의에 참석한 정치 지도자들은 대부분 화려한 전통 의복을 착용하며 민족적 자의식을 뽐냈다. 특히 하얀 재킷과 검고 긴 바지를 입은 캄보디아 대표단과 노란 아오테이를 입은 베트남 대표단이 반둥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어떤 민족의상이든 그것은 각기 신생 자주독립국의 위용과 자신감의 표현으로 충분했다. 숙소로 사용했던 두 호텔에서 회의 장소인 게둥 메르데카까지 대략 50~100m 정도의 거리를 매일 아침 대표단들은 함께 걸어가며 현지 주민들의 환호에 화답했다(‘자유의 행진’). 반둥 시민들은 그들에게 “각하, 메르데카(merdeka·자유)”를 연발하며 맞았다. 북베트남의 호찌민, 이집트의 나세르,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1세, 가나 독립운동의 기수 은크루마 등도 환영받았지만, 인도 총리 네루와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와 이집트의 젊은 지도자 나세르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각하, 메르데카!”

회의 초반에는 신사의 품격과 지성을 갖춘 네루가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행사했지만 곧 명민하고 유연한 저우언라이가 좌중을 휘어잡았다. 애초 이데올로기적 이유로 중국 대표의 회의 참여를 반대하거나 우려했던 각국 정치 지도자들은 인도와 이집트뿐 아니라 중국과 함께할 때만이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독립적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회의장에서는 저우언라이 주변에 더 많은 정치가들이 몰렸고, 거리에서는 그의 두껍고 검은 눈썹에 대해 애정 어린 말들이 넘쳤다.

회의는 ‘평화 10원칙’을 내걸며 최종의정서를 발표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폐기를 선언했지만 그것을 넘어 민족자결과 자존에 기초한 새로운 국제 연대와 협력의 방향을 제시했다. 이미 1년 전 저우언라이와 네루가 합의해 발표한 평화 5원칙, 즉 영토주권의 상호존중, 상호불가침, 내정불간섭, 평등과 호혜, 평화 공존에 더해 ‘세계인권선언’을 존중하며 보충하는 내용들로 채워졌다. 아울러 최종의정서는 추상적인 평화 원칙과 민족자결 및 인권 준수를 넘어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식민주의 국가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개선을 요구했다. 알제리·모로코·튀니지의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지와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 요구, 캄보디아·실론·일본·요르단·리비아·네팔 등의 국가에 대한 유엔 회원국 자격 부여 그리고 군비 축소 요구 등이 빠지지 않았다. 반둥회의는 선하고 멋진 말들로 포장한 채 실제로는 기우뚱하고 폭력적인 국제정치 현실의 권력관계를 비켜가는 길을 택하지 않았고 새로운 국제 평화정치의 규범을 구체적인 핏빛 요구와 결합했다.

특히 반둥회의는 단순히 반식민주의 선언과 민족자결의 요구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독립국가들이 새롭게 발전하며 독자적인 정치적·경제적 발전의 길을 개척할지를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최종의정서가 무엇보다 ‘경제협력’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길게 담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반둥회의의 ‘유색’ 정치 지도자들은 식민지 해방운동의 대표가 아니라 해방된 탈식민 독립국가의 주체이자 국제정치 무대의 ‘새로운 세력’으로 나서고자 했다. 다시 말해, 최종의정서는 단순히 식민주의에 대한 준엄한 질타를 넘어 참가국들 사이의 경제와 문화 협력을 비롯한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인 주제를 더 주요하게 다루었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그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신생국가들의 자립적 생존을 위해 ‘비동맹’ 원칙을 찾았다. 그들은 참가국들이 개별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양대 열강과 외교관계나 경제협력 관계를 맺더라도 최소한 양 열강의 군사동맹 체제에는 편입하지 말자는 원칙에 동의했다. 그것은 ‘평화 10원칙’의 6항에서 “어떤 강대국의 특정한 이익에 봉사하는 집단적 방어제도의 불용”으로 명문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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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겁던 약속은 허무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의상과 피부색만큼 각국의 상황과 입장은 차이가 컸다. 감정의 코뮤니타스나 공연에 가까운 정치 축제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난관이 널려 있었다. 즉, 식민지배 극복이라는 공통의 역사적 경험만으로는 각국의 복잡한 정치 현실과 미래지향의 간극 차이를 제대로 메우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미국과 유럽 식민국가 외에 소련을 식민주의 지배자로 볼 수 있을지의 문제와 냉전 대결을 극복하기 위한 독자적 공동 기구를 설치하거나 연대 행동을 취할 수 있을지를 둘러싸고 이견이 존재했다. 일부 참가국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개입과 압박도 무시할 수 없었다. 파키스탄·실론·필리핀 같은 친서방적 국가들, 중국·북베트남의 사회주의 지향 국가들 그리고 인도·인도네시아 등 중립주의 국가들 사이의 입장 차이는 뚜렷했다. 그렇기에 ‘비동맹’ 문제는 더 매끄럽게 다루어지지도 못했고 충분히 합의되지도 못한 채 선언의 일부로 그쳤다. 그리하여 ‘평화 10원칙’ 5항은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개별 국가의 권리를 존중한다고 퇴로를 열어두었다. 비록 ‘유엔헌장에 합치하는’ 조건을 걸었지만. 아울러 곧 밀어닥치는 국제 냉전 대결의 가속화와 위기는 반둥회의 참가국들의 선택과 행동 자유를 더욱 좁혔다. 또 반둥회의 뒤 발화하는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과 중국과 소련의 갈등은 ‘유색’인종의 연대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결국 그 회의는 연속되지 못했다.

역사는 분명 직선은 아니고 항상 상향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안개처럼 그저 흩어지거나 무지개처럼 문득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반둥회의의 정신을 이어 1961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제3세계’의 ‘비동맹회의’는 냉전을 직접 극복하지도 못했고 오히려 내부 갈등으로 계속 질퍽거렸지만 탈냉전의 평화 규범을 끊임없이 환기한 성과도 없지 않다. 또 1950년대 중반 유럽의 탈냉전 평화 사상가들과 정치가들은 무엇보다 바로 그 반둥회의에 크게 고무돼 새로운 활력을 찾았다. 그들은 반둥회의 평화 원칙을 유럽적 맥락에서 적극 수용해 1960년대 유럽 데탕트의 출현에 적극 기여했다. 다른 한편, 반둥회의는 당시 막 등장하고 있던 미국 주도의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라는 반공군사동맹의 위세를 누르며 다른 대안적 국제질서의 가능성을 부각했다. 게다가 1961년 필리핀·타이·말레이시아가 주도하고 1967년 인도네시아·싱가포르가 결속해 함께 결성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도 주로 경제협력과 문화 교류에 중심을 두되 군사 블록화에는 거리를 두었다. 그것 또한 반둥회의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반둥회의에 한반도의 두 국가는 초대받지 못했다. 한국전쟁의 당사자이자 군사동맹국이라는 이유로 한반도 국가들은 참석이 배제되었다. 한국은 당시 처절하게 냉전의 시궁창에 빠져 버림을 받았던 것이다. 오히려 일본이 옛 식민국가로는 유일하게 초대받는 복을 누렸다. 60년이 지나 인도네시아와 일부 ASEAN 국가들은 미국과 중국의 열강 경쟁 구도 사이에서 새로운 생존과 협력의 길을 찾고자 반둥회의를 기념하며 정치적 지혜를 찾고 있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 또한 ‘제2의 저우언라이’라도 되는 양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을 중심으로 ‘신형국제관계’를 만들자고 야심찬 구상을 발표했다. 심지어 일본의 아베 총리 또한 그 나름으로 기념식을 활용했다. 최적지와 ‘골든타임’을 놓친 한국의 권력자가 엉뚱한 방향에서 뒤늦게 돌아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배치를 선언하며 또다시 역사를 이탈하지 않을까 벌써부터 황망하다.

그런 욕망, 한반도에는 없는가?

반둥회의 최종의정서는 명문으로 빛난다. 그중 한 단락을 읽어보는 것으로 과거의 아쉬움과 현재의 한심함을 메우자.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스스로의 문화와 문명이 비옥하게 되는 과정에서 다른 문화들과 문명들을 비옥하게 만든 위대한 종교와 문명의 요람이었다. 이와 같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문화는 정신적이고 보편적인 기반 위에 서 있다. 불행하게도 지난 몇 세기 동안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 간의 접촉은 방해받았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인민들은 이제 그들의 오랜 문화 접촉을 재생하고 현대 세계의 맥락에서 새로운 접촉을 발전시킬 강렬하고 진실한 욕망을 지니고 있다.” 그런 ‘강렬하고 진실한 욕망’이 한반도에는 정녕 없는가? 60년 전 반둥의 주민들처럼 우리도 외쳐보자. “각하, 메르데카!”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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