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초부터 곳곳에 홍보물이 내걸렸다. 뒷유리에 홍보 문구를 적은 차도 많이 돌아다녔다. 지체장애가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돕기 위한 모금운동 ‘텔레톤’ 홍보다. 마라톤처럼 텔레비전에서 27시간 모금방송을 하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 팔과 손이 모두 짧게 태어난 해맑은 꼬마가 홍보 모델이다. ‘돈 프란시스코’로 불리는 73살의 유명 TV 사회자 마리오 크루츠버거가 올해도 이 모금운동을 이끌었다.
나라가 떠들썩했다. 11월28~29일 모금 기간에 공중파 채널은 온통 텔레톤 방송만 내보냈다. 후원 기업들은 오래전부터 자사 제품에 텔레톤 로고를 붙이고 수익금을 기부하는 판매 홍보를 해왔다. 11월29일에는 모금 마라톤을 해서 시내가 꽉 막혔다. 한류 팬클럽도 올해 처음 성금을 모으는 ‘케이톤’(K-ton) 행사를 했다.
한국에서 연말 불우이웃돕기 모금방송을 봤던 옛 기억이 난다. 돼지저금통을 들고 나와 사연을 전하곤 했다. 텔레톤은 방송사 대신 칠레 은행으로 간다. 기부금을 받는 이 은행은 모금 기간에 밤새 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불어 어려운 이웃이 생각나는 겨울이 아니라, 연말이지만 더워서 반팔을 입는 여름에 진행되는 게 좀 낯설다. 진지 또는 잔잔한 분위기 대신 춤추고 노래하는 일종의 ‘모금 축제’다.
올해 모금 목표는 한국 돈으로 약 466억원. 주위에 1만원, 2만원씩 기부한 사람이 많았다. 재벌 ‘룩시크’ 가문은 재활시설을 짓는 데 쓰라며 약 45억원을 내놨다. 1978년 텔레톤 시작 이후 최고 기부 금액이다. 오랜만에 비가 쏟아졌는데도, 목표액을 넘는 약 516억원을 모았다. 딸이 신문에 끼어온 종이를 접어 텔레톤 저금통을 만들었지만, 그 저금통은 동전 몇 개만 든 채 아직 그대로 책상 위에 굴러다닌다.
수많은 불우이웃 가운데, 하필 왜 장애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이런 대성공을 거둘까? 돈 프란시스코의 인기 등 이유가 여럿 있지만, “의료서비스가 워낙 비싸다보니 장기 치료를 받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특별히 더 도움이 필요하다”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예방접종을 받아도 된다는 의사소견서를 받는 데 5만원을 낸 적이 있다.
칠레의 극심한 빈부 격차, 빈약한 사회안전망. 그 탓에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의료서비스 같은 사회복지 문제가 1년에 한 번 하는 ‘적선’으로 풀릴 것 같지 않다. 이것이 꼭 나 혼자만의 삐딱한 생각은 아닌가보다.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비판이 많았다. “정부가 제 역할을 못하니, 수십 년 동안 같은 이유로 민간이 모금운동을 한다.” “장애인 권리 보장 차원에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장애인을 눈물을 짜내는 시혜의 대상으로 만들어 돈을 긁어모은다.” “1년 내내 장애인을 사회적으로 홀대하다가 일회성 기부로 위안을 삼는다.”
어찌됐든 친구 마리아의 말처럼 텔레톤은 “다 같은 칠레인으로서 서로 돕는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기회가 된다”. 모금방송 한쪽에서는 칠레의 전통춤 쿠에카를 췄다. 사회자는 목표액을 달성하자, “칠레 파이팅, 칠레 파이팅”을 외치며 “칠레인 모두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학생 페르난도의 말처럼 “텔레톤이 끝나면 모두 일상으로 돌아간다”. 연대와 공동체를 외치며 현실을 위로하는 며칠 대신 극심한 빈부 격차가 생활화된 일상으로. 근본적 사회 개혁을 추진하는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는 11월2일 나온 여론조사에서, 반대가 47%를 기록해 올해 취임 뒤 처음으로 지지(45%)를 넘어섰다.
산티아고(칠레)=김순배 유학생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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