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깃발을 내건 영국 버밍엄의 한 가정집 모습. 김기태
영국의 주택가를 걷다보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눈에 띄었다.
영국에서도 잉글랜드 지역을 상징하는, 흰 바탕에 붉은색 십자가 그려진 ‘세인트 조지’ 깃발을 뜬금없이 내걸어놓은 집들이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집 전면을 깃발로 도배하다시피 한 집도 있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다양한 크기의 국기들은, 무슨 국경일이 아닌데도, 사시사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집주인의 애국심을 격하게 과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궁금했다. 그렇다고 뜬금없이 남의 집 대문을 노크해서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령 그렇게 해도, 스킨헤드에 문신을 박은 백인 아저씨의 총부리가 내 가슴팍에 떡하니 얹힐 것 같은 엉뚱한 상상을 하곤 했다. 일부 영국인들이 드러내는 격한 애국심에는, 보는 이를 불편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옛날에는 그랬지. 그렇게 집 앞을 꾸미는 것이 극우적인 표현이었어. 지금은 글쎄, 그냥 개인의 별난 취향 정도로 보는 분위기야.” 몇 달 전엔가, 펍에서 맥주를 같이 홀짝이면서 은사인 파월 교수가 건네준 말이었다. 그의 고향은 잉글랜드가 아닌 웨일스였다. 영국인이되 잉글랜드인은 아닌 그의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해보니, 그럴 법도 했다. 영국은 100년 전, 혹은 50년 전의 강대국이 더 이상 아니다. 적십자가를 나부끼는 깃발은 한때 대양을 뒤덮으며 애먼 식민지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을지는 몰라도, 이제는 버밍엄의 시골 골목길에서나 지나가버린 제국의 영광을 남루하게 추억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설혹 그 향수에 극우적 감수성이 배어 있을지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영국인들의 태도가 무심할 수 있다면, 과시적인 애국심도 자기 집 앞뜰에 갇힌 ‘마니아적’ 취향 정도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난봄 월드컵 기간에는 특히나 그랬다. 영국 남부 사우샘프턴에 사는 46살 토니 배덤스는 300여 개의 크고 작은 잉글랜드 깃발로 집 전체를 아예 도배해서 영국의 수다스러운 타블로이드 신문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가 심지어 창문까지 깃발로 꽁꽁 덮어버리는 바람에 아내 아니타는 환기를 위해 대문을 항상 연 채로 산다고 하소연했다. 이쯤 되면 영국인들의 별난 행태는 차라리 귀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월드컵 때마다 수도의 중심 광장을 국기로 뒤덮어버리는 한국인의 극성에 견주면 말이다.
그런데, 하필 이 잉글랜드 깃발 때문에 이 나라 그림자내각(예비내각)의 장관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이 최근 벌어졌다. 발단은 노동당 국회의원인 에밀리 손버리가 트위터에 올린 한 장의 사진이었다. 사진은 영국의 평범한 가정집 벽에 걸린 잉글랜드 상징기를 담았는데, 여기에는 ‘로체스터의 이미지’라는 짧은 설명이 붙었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그가 트위터에 사진을 올린 그날, 문제의 잉글랜드 남동부 로체스터 지역에서 열린 하원의원 보궐선거에서 극우정당인 영국독립당의 후보가 당선됐다.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당선자는 보수당과 노동당 등 주요 정당의 후보를 모조리 10%대의 득표율로 주저앉힌 뒤, 무려 42%의 표를 쓸어담았다. 당선자는 유세 중에 “유럽연합(EU)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은 본토로 돌아가도록 하겠다”는 투의 발언으로 구설에 올랐던 인물이다. 손버리 의원이 트위터에 올린 이미지는 극우 후보를 팍팍 밀어준 지역 유권자에 대한 야유였다. 곧 유권자를 모욕했다는 여론의 십자포화가 불을 뿜었고, 야심만만한 야당 의원은 누더기가 된 채 그림자내각에서 물러났다.
문제의 영국독립당은 1993년 창당한 뒤 극단적 정책으로 유권자의 비아냥을 받는 정당에 가까웠다. 2001년 선거에서는 1.5%의 득표율을 보였을 뿐이다.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섬나라에서 스멀스멀 퍼져가는 반이민, 반EU 정서는 극우정당의 등에 날개를 달아줬다. 선거를 할수록 득표율이 올랐다. 정당의 고공행진을 따라, 영국독립당의 지지자들도 기이한 성향을 가진 ‘극우 꼴통’이 아니라,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멀쩡한 유권자들로 변신해갔다. 극우정당의 득세와 함께, 뜬금없이 벽에 내걸린 영국 깃발도 더 이상 유별난 취향이 아니게 돼버렸다.
버밍엄(영국)=김기태 유학생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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