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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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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채에 국물이 출렁, 짜장에 국물이 찰랑

10대 후반부터 유랑의 연속인 새 주방장 인드라,

그는 ‘헤드 셰프’가 되는 사다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등록 2014-11-29 15:25 수정 2020-05-03 04:27
우리 식당의 주방장인 27살 인드라의 인생은 10대 후반부터 유랑의 연속이다. 유현산

우리 식당의 주방장인 27살 인드라의 인생은 10대 후반부터 유랑의 연속이다. 유현산

자카르타에 우기가 온다. 새 주방장 인드라는 주방 배식구 앞에 앉아 푸드코트 창문 밖에 펼쳐진 잿빛 하늘을 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끔 인상을 찌푸리거나 미소를 짓는다.

“보스, 서자카르타엔 화교가 많아요. 화교들은 국물을 좋아한다고요.” 인드라는 내가 중국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방금 한 손님이 갈색 국물에 잠긴 투명한 면을 포크로 건져먹는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 주방 의자에 앉아 잡채라는 음식에 국물이 출렁거려서는 안 된다고 설득한다. 인드라는 인니어와 영어가 섞인 내 괴상한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미간을 좁힌다. 내가 빨리 인니어에 능숙해지지 않는다면 그 미간엔 주름이 생길 것이다. “알았어요, 보스. 문제없어요.” 알았다, 할 수 있다, 문제없다, 인도네시아인의 이 3종 세트 말의 성찬을 믿었다간 낭패를 본다.

인드라는 10년 동안 중식당과 인도네시아 식당에서 일했다. 1987년 11월20일 서자카르타의 타나방에서 태어나, 그 지역 SMK(실업고)에서 회계를 전공했다. 일자리가 없어서 서자카르타에 있는 중식당 ‘임페리얼 셰프’에서 접시를 닦았다. 1년 뒤 계약 기간이 끝나자 북자카르타에 있는 중식당 ‘마에스터’에서 채소를 잘랐다. 그 뒤 자카르타 중심에 있는 중식당 ‘크리스탈 자데’에서 고기를 자르고 밥을 했다.

‘크리스탈 자데’와의 계약이 끝날 무렵, 술라웨시에 중식당을 연다는 사장을 만났다. 인드라는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자와섬을 떠나 술라웨시로 갔다. 일은 힘들었지만 술라웨시의 풍광은 아름다웠다. 쉬는 시간엔 호수에서 수영을 하며 놀았다. “재밌었어요. 술도 많이 마셨어요.” 무슬림이 술을 마신다는 얘기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인드라는 술병을 입에 대는 시늉을 한다. 그의 팔뚝은 아주 굵고 힘줄이 불거져 있다. “중식당 요리사들은 조리용 술을 마시면서 일해요. 아, 물론 지금은 안 마시죠.” 인드라는 인도네시아인 특유의 겸손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저 미소가 좋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주방에 조리용 술을 두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월급 인상이 좌절된 인드라는 자와섬으로 돌아와 자카르타 북서쪽 위성도시 탕으랑에 있는 인니 음식점 ‘박미’에서 일했다. 계약 기간이 끝나자 서자카르타에 있는 말레이시아 음식점 ‘리틀 페낭’에 들어갔다. 거기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지금의 애인을 만났지만 재계약이 또 무산됐다. 그 뒤 남자카르타 크망에 있는 디스코텍 주방에서 새벽 3시까지 안주를 만들었고, 서자카르타의 중식당 ‘딘 타이 펑’에서 고기를 잘랐고, 지금 이 식당 주방에서 사장과 국물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27살 인드라의 인생은 10대 후반부터 유랑의 연속이다.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인구 1천만 대도시 자카르타 곳곳으로, 그 주변에 점점이 뿌려진 위성도시들로, 여의치 않으면 다른 섬을 넘나들며 살아간다. 재계약이 어려울뿐더러, 재계약을 해도 더 나은 직위나 임금을 받기 힘들기 때문이다. 여성 노동자의 경우가 더 심하다. 나이가 차서 공장에서 일하기 힘든 여성들이 더러 성매매로 빠져들기도 한다고 한 교민은 귀띔했다. 저임금에 의존하는 인도네시아 경제와 인드라에겐 모두 사다리가 없다. 인드라는 이곳에서 헤드 셰프로 가는 사다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그는 국물을 줄여야 한다. 우리 식당 비장의 신메뉴인 짜장면에 국물이 찰랑거리는 장면을 떠올리면 나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떡볶이 주문이 들어온다. 인드라의 전투가 시작된다. 가스레인지의 불이 켜지고 프라이팬에 양념이 투척된다.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소리친다. “인드라, 국물 좀 그만 넣어! 그건 떡볶이가 아니라 빨간 떡국이야!”

자카르타(인도네시아)=유현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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