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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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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철군, 새로운 전쟁의 시작

⑤ 아프간에 도래한 힘의 공백과 이슬람 세력의 팽창
소련의 제안대로 미국은 무장세력 지원을 멈췄어야 했다
등록 2013-12-07 14:42 수정 2020-05-03 04:27

1987년 12월 미국-소련 정상회담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정식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련 철군 의사를 전달하고, 무자헤딘들에 대한 중앙정보국(CIA)의 지원 중단도 요청했다. 하지만 레이건은 그건 불가능하다고 거절했다. 석 달 전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조지 슐츠 미국 국무장관을 통해 전달한 소련군 철군과 이슬람주의 확산 방지 협력을 워싱턴은 전혀 고려한 흔적이 없었다. 우선 워싱턴은 소련의 진의를 믿지 못하는 분위기였고, 소련 철군 이후의 전략적 목표도 부재했기 때문이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철군 이후 전략 목표 부재했던 미국</font></font>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안보 분야 고위 관리들이 모인 오찬에서 로버트 게이츠 CIA 국장은 소련 철군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며, 모스크바는 현재 정치적 속임수를 쓰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레이건 행정부 임기 내에 소련군이 철군하면 25달러를 주기로 마이클 아머코스트 국무부 부장관과 내기를 했다. 몇 달 뒤 그는 아머코스트에게 그 돈을 줘야만 했다. 소련은 미국이 예상할 수 있었던 모든 일정보다도 빠르게 움직였다. 이제 워싱턴도 소련군 철군과 그 이후의 아프간에 대해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게이츠 국장의 지휘 아래 작성된 이 문제에 대한 미국 정보기관들의 특별안보정보평가서 ‘소련: 아프간에서의 철군’은 “나지불라 정권은 소련군 철군 완료 이후에 소련의 계속된 지원에도 오래 생존하지 못할 것이다”라며 “그 정권은 철군이 완료되기 전에 붕괴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보고서는 대체 정부가 “이슬람주의, 아마도 강력한 근본주의 성향을 띨 것이나 이란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을 것이나… 서방에 대한 태도를 자신할 수는 없다”며 “최악의 경우 특히 미국에 대해 적극적으로 적대적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CIA 등 미국 정보 당국은 비교적 정확한 판단을 했다. 미국은 아프간의 나지불라 공산정권의 급속한 붕괴가 불가피하고 카불의 새로운 정부가 미국에 적대적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굴부딘 헤크마티아르로 대표되는 이슬람주의 무자헤딘 세력을 억제하고 미국과 서방에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적 노력을 하는 것이 다음 수순이어야 했다. 하지만 미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선 그때까지 아프간 정책과 공작의 주무 부처인 CIA 입장에서는 소련군 철군 이후는 자신들의 소관 사항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CIA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공작인 아프간 전쟁의 완전한 승리만을 온전히 남기고 싶어 했다. 소련을 아프간에서 굴욕적으로 도망가게 하는 그 순간을 덧칠할 정치적 협상을 바라지 않았다. CIA의 근동국은 아프간 공작은 소련의 힘과 침략에 맞서는 것이었다며 소련군이 완전히 철군할 때 CIA도 아프간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공작을 이제 재건 프로젝트로 바꾼다는 것은 실수라고 강조했다.
CIA는 소련 철군 이후의 아프간은 파키스탄 정보부에 맡겨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파키스탄 정보부가 자신들이 지원하던 헤크마티아르 등 이슬람주의 세력의 정부를 세울지라도, 아프간에 대한 파키스탄의 헤게모니만 존재한다면 미국의 이익에 중대한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논리의 결론은 무자헤딘, 특히 파키스탄 정보부가 선호하는 헤크마티아르 등 이슬람주의 세력에게 계속된 지원을 통해 나지불라 정권을 신속히 붕괴시켜 소련의 영향이 배제된 새 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소련의 철군 통보 이후부터 정치적 타결을 원했던 조지 슐츠가 수장인 국무부 쪽은 이슬람주의 무자헤딘 세력의 무모함, 그리고 정치적 협상이 없을 경우 소련의 계속되는 지원에 기댄 나지불라 정권의 존속 가능성을 보고받고 있었다. 소련이 제안하는 정치적 협상, 즉 소련군도 철수하고 CIA의 지원도 중단한 가운데 이슬람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는 협상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으나 이는 곧 묻혀버렸다. 그 주인공은 레이건 대통령이었다. 그는 1988년 초 인터뷰에서 미국이 아프간 반군 지원을 중단해야 하는 동안에 소련이 나지불라 정권에 군사·경제적 지원을 계속한다면 이는 공정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슐츠 등 레이건의 외교 협상가들은 소련이 요구하던 CIA 지원 중단을 준비하다가 곧 포기했다. 대신 모스크바가 카불 정권을 지원하는 한 CIA에도 무자헤딘에 대한 총과 돈 지원을 허용하는 ‘적극적 균형’ 정책을 내놓았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나지불라 정권, 소련 붕괴 뒤 4년을 버티다</font></font>

1988년 4월14일, 아프간에서 소련군 철군을 1992년 초까지 완료한다는 제네바조약이 체결됐고, 한 달 뒤 잘랄라바드의 소련군 1만2천 명이 첫 철군을 시작했다. 이는 아프간 전쟁 종식의 시작이 아니었다. 그 뒤 계속될 새로운 전쟁들의 시작이었다. 무자헤딘에 대한 CIA의 지원 중단 약속을 얻어내지 못한 소련은 철군하는 소련군의 전투 개입은 중단했으나,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경제·군사적 지원을 계속했다. 점증하는 이슬람주의 세력 확산 위협에 대한 자신들 안보에 대한 자구책이었다. 소련의 지원도 있었지만, 나지불라도 전임 지도자와는 달랐다. 1987년 소련에 의해 일종의 위기관리 정부 수반으로 임명된 그는 자신과 가족의 뼈를 아프간에 묻겠다며 결코 도망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의사 출신이자 아프간 정보부 수장을 지낸 모하마드 나지불라는 실제로 소련과 국제사회, 그리고 비이슬람주의 무자헤딘 세력들의 거듭된 망명 제안을 거절했다. 1996년 카불에 입성한 탈레반 세력에게 처형돼 결국 뼈를 조국 땅에 묻었다.
곧 붕괴될 것이라던 나지불라 정권은 그 뒤 소련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4년 이상 존속됐다. 나지불라 정권은 결연히 무자헤딘 세력에 맞섰다. 폭정이기는 했으나 사회주의 정권에서 현대적 제도를 향유했던 카불 등 대도시 시민들도 이슬람주의 무자헤딘의 집권을 원하지 않았다. 나지불라 정권 대 무자헤딘 세력 사이의 전쟁이 불붙는 가운데 파키스탄 정보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파키스탄 접경 지역의 헤크마티아르 등 이슬람주의 무자헤딘 대 러시아 접경 북부 판지시르 지역의 아흐마드 샤 마수드로 대표되는 중도 성향의 비이슬람주의 무자헤딘 세력의 경쟁과 갈등도 점증해갔다.
소련군 철군 시작 이후 아프간을 수수방관한 것은 미국에 또 하나의 재앙이었다. 한층 가까워진 성전의 승리에 동참하려는 아랍 등 이슬람권 전역의 젊은이들이 아프간으로 더 모여들었고, 이들은 이제 아프간 및 페샤와르 등 접경 파키스탄 지역에서 그 세력을 확장해 향후 이슬람주의 지하디스트들의 훈련장으로 만들었다. 1989년쯤에는 압둘 라술 사야프 휘하에만 약 4천 명의 아랍 출신 무자헤딘이 모여들었다. 갑자기 아프간은 미국 대외정책의 공백 지역이 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소련군 철군이 시작된 1988년부터 냉전 구도가 흔들리면서, 미국은 아프간에 신경 쓸 의지도 여력도 없게 됐다.
레이건에 이어 집권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곧 1989년 독일 베를린장벽 붕괴로 시작된 동구권 해체와 연이은 소련 붕괴라는 냉전 구도 와해의 대격변, 그리고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으로 인한 걸프전 등으로 아프간 전쟁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1991년쯤이 되면 아프간은 미국의 대외정책 의제에서 사라져버렸다. 당시 밀턴 비어든 CIA 이슬라마바드 지부장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은 파키스탄을 통한 CIA의 무자헤딘 지원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당황했다는 것이다. 부시는 “그게 아직도 계속되냐”고 물으며 아프간에서 아직 전쟁이 지속 중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곤혹감을 보였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아잠 대 빈라덴, 일국혁명 대 영구혁명</font></font>

지난 10년 동안 대소 봉쇄를 위한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 지역이 갑자기 그렇게 무관심 지역으로 전락한 것은 19세기 이후 아프간을 둘러싸고 패권 다툼을 벌인 열강의 계속된 실수의 반복이기도 했다. 열강의 패권 다툼이 끝난 뒤 아프간은 잊혀진 땅이 됐고, 그 사이에 열강의 패권 쟁패가 뿌린 씨앗은 또 다른 패권 다툼과 갈등을 부르는 큰 열매를 잉태했다. 소련군 철군 이후 무주공산이 된 아프간에서 벌어진 전선 없는 무정형의 내전 속에서 이슬람주의 무장세력들은 더 성장했고, 또 아프간 땅에 탈레반이라는 현대 이슬람주의 역사상 가장 과격한 정권이 들어서는 결과를 낳았다. 10년 뒤 9·11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는 이 탈레반 정권을 안식처로 하여 성장하는 등 이슬람권에서 국경을 넘나드는 초국적 이슬람주의 무장조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국과 국제사회에서 아프간 전쟁이 완전히 잊혀지던 1989년 11월24일, 아프간 접경도시 페샤와르의 사바이레일 사원 입구에서 차량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금요예배를 하려고 사원으로 들어서던 압둘라 아잠과 두 아들이 그 자리에서 폭사했다. 팔레스타인 이슬람주의 무장조직 하마스의 창립자 중 한 명인 아잠은 아프간 전쟁이 발발하자 이를 무슬림들의 성전으로 규정하고 아랍 등 이슬람권의 전사들을 아프간으로 모집한 중심 인물이다. 그는 오사마 빈라덴과 함께 1984년 페샤와르에 ‘서비시스 오피스’(Services Office)를 창립해, 아랍 출신 무자헤딘을 아프간으로 모집해 훈련시키고 지원하는 주요 세력의 지도자였다. 그는 빈라덴의 정치적 스승이었고, 빈라덴은 그 조직의 지도자가 아니라 단지 재정적 지원자에 머물렀다.
1986년이 지나면서 아잠과 빈라덴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빈라덴은 자지 전투 등에서 소련군과의 직접 전투 참여로 명성을 쌓으면서, 아잠과는 다른 노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잠은 아랍 출신 무자헤딘들의 개별 전투를 반대했고, 무자헤딘들의 통일을 원했다. 그는 무자헤딘들의 단결과 통일로 아프간에 건실한 수니파 이슬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선결 과제라고 봤다. 반면 빈라덴은 생각이 달라져갔다. 빈라덴은 이제 아프간에서의 지하드뿐만 아니라 아랍 세계 전역에서의 정권 교체에도 초점을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에서의 사회주의 혁명 완성에 초점을 둬야 한다는 스탈린 일국사회주의 혁명론과 전세계의 동시혁명을 주장한 레온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비견되는 논쟁이었다. 소련에서는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혁명론이 승리했지만, 이슬람주의 이론가들과 전사들이 논쟁을 벌이던 페샤와르에서는 빈라덴의 ‘영구혁명론’이 승리했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아잠의 죽음과 알카에다의 성장</font></font>

이후 아잠은 그의 사위에게 빈라덴의 무모함에 대해 자주 불만을 토로했다. 아잠의 죽음 뒤 헤게모니를 놓고 빈라덴은 그의 사위와 노선투쟁을 벌여 승리하고, 서비시스 오피스는 이제 빈라덴의 조직인 알카에다로 바뀌는 단계에 들어섰다. 아잠의 죽음 배후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아프간 정보부의 소행이라는 추측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헤크마티아르 등 파키스탄이 후원하는 이슬람주의 무자헤딘들은 아잠을 배척했다는 점이다. 무자헤딘의 단결과 통일을 요구한 아잠은 그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제 페샤와르 등 파키스탄 접경지대와 아프간에서 활동하는 아랍 등 이슬람권에서 모여든 지하디스트들은 아프간 현지 무자헤딘과는 점점 다른 길을 가는 독립 세력으로 나아갔다. 그들에게는 이제 이슬람 세계를 또다시 흔드는 걸프전을 시작으로 알제리 내전, 체첸 전쟁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초국적 이슬람주의 무장조직들의 서방을 상대로 한 테러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미국 당국은 199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알카에다라는 이름을 처음 파악하며, 빈라덴이 그 중심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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