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은 사건이 발생하 면 그제야 대응하지만,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연방공화국(서독) 총리는 아예 역사를 만든 사람이다. 1970년 미국 시사주간지 이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면서 한 말이 다. 브란트 전 총리는 197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의 동방정책은 새로운 역사를 만 들었다. 동·서독은 분단에서 통일로, 유럽 은 냉전에서 평화협력으로 전환했다. 비전 을 가진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브란 트 전 총리가 보여주고 있다.
1969년 사민당 주도의 사민-자민당 연립 정부가 출범했다. 사민당 대표 빌리 브란트 가 총리가 되었다. 그는 1970년 1월 독일민 주공화국(동독)의 각료회의 의장, 곧 총리인 빌리 슈토프에게 편지를 썼다. 아무런 조건 없이 만나자는 제안이었다. 슈토프는 그해 2 월에 브란트를 동베를린으로 초대했다. 조건 은 비행기를 타고 오라는 것이었다.
브란트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1957년부 터 10년 동안 서베를린 시장이었다. 1961년 8월 장벽이 세워지고, 서베를린이 서독으로 부터 고립되는 이른바 ‘베를린 위기’를 직접 겪었다. 장벽에 작은 틈을 내서 교류의 물꼬 를 튼 것도 그였다. 브란트는 1963년 서베를 린 시장으로 통행증 협정을 성사시켰다. 그 래서 성탄절 기간에 장벽을 넘어 서독 주민 들이 동베를린의 친척과 가족을 만날 수 있 었다. 그런 그였기에 당연히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으로, 하늘이 아니라 땅으로 직접 가려고 했다.
정상회담 장소를 둘러싼 신경전이 벌어 졌다. 결국 1차 정상회담 장소는 동독 지역 의 국경도시 에르푸르트였다. 1970년 3월19 일 브란트는 에르푸르트로 가는 기차를 타 면서, “정치는 인류와 평화에 기여할 때만 내 게 의미가 있다”고 다짐했다. 기차역 근처의 호텔에 도착했을 때, 광장에 모인 수많은 동 독 시민들이 ‘빌리’를 외쳤다. 브란트는 그들 이 자신들의 지도자 빌리 슈토프를 연호하 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이 환호한 것은 브 란트였다.
창가로 다가간 브란트는 한 손을 들어 화 답했다. 그러나 곧바로 두 손을 낮게 펼쳐 자 제를 부탁했다. 사려 깊은 행동이었다. 자신 은 곧 돌아가지만, 그들은 이 땅에 살아야 하고, 자신 때문에 괜한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장면을 지켜본 수행원 들은 모두 울었다. 빌리 브란트도 분단의 현 실이 아파서 눈물을 흘렸다.
첫 번째 정상회담은 성과가 없었다. 동독 총리 슈토프는 동독 승인 문제에 집착했다. 당시 동독은 이른바 ‘근본 문제’, 곧 동독 승인 과 유엔 동시 가입 등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견줘 서독은 양 국의 대화와 소통, 그리고 인적 교류의 장애 제거 등을 주장했다. 동독이 정치적 접근을 했다면, 서독은 단계적 접근으로 대응했다.
동방정책의 이론적 설계자 바르
두 달이 조금 지난 5월21일 두 번째 정상 회담이 열렸다. 이번에는 서독의 국경도시 카셀에서였다. 슈토프가 카셀을 방문했을 때, 소동이 일어났다. 민주주의국가에서 회 담을 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여론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익 시위 군중은 회담장 앞에 게양된 동독 국기를 내려서 불태웠다. 일부는 공산당 계열 시위대와 격렬하게 충돌 했다. 결국 극우파와 극좌파의 충돌로 두 정 상의 나치 시대 희생자 추모탑 헌화 행사가 취소됐다. 브란트는 20개 항에 이르는 동· 서독 관계의 쟁점에 대한 정책을 제시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슈토프는 동독으로 돌아가 우익 시위를 강력히 비난했다. 동·서 독 관계는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브란트의 곁을 지킨 보좌관이자 오랜 정치적 동지인 에곤 바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르는 동방정책의 이론적 설계자로 불린다. 1963년부터 브란트와 같이 일했다. 동방정책의 핵심인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개념도, ‘털신을 신은 작은 발걸음 정책’이라는 개념도 바르가 만들었다. 두 사람은 유럽의 한가운데라는 독일의 지정학적 위치에 주목했다. 그래서 독일이 동과 서의 다리가 되자고 생각했다. 그것이 냉전시대 분단국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의미 있는 외교정책이라고 보았다.
그러려면 우선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했다. 마침 국제 환경도 조성됐다. 1968년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국제적 긴장 완화의 물결이 일었다. 브란트와 바르는 자신들이 오랫동안 베를린에서 느끼고 준비하고 다듬은 비전이 실현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물론 미국과의 협력은 쉽지 않았다.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은 자신들의 세계 전략에서 서독의 동방정책을 하위 요소로 인식했다. 데탕트의 주역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경쟁심도 있었다. 그래서 동방정책의 ‘속도’에 불만이 적지 않았다.
1970년 어느 날 바르가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키신저와 대화를 나누었다. 바르는 소련과의 협상을 비롯한 동·서독 관계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하고 미국의 이해를 구했다. 키신저는 의구심을 드러냈다. 그때 바르가 말했다. “헨리, 나는 자네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통보를 하러 온 거야. 우리는 반드시 성공하고 말 거야.” 시간이 흘러 미국과 서독의 관계는 점차 신뢰를 형성했다.
소련도 서독과의 대화를 원했다. 소련은 1968년 체코에서 ‘프라하의 봄’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상당한 외교적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1969년 봄에는 중국과 국경 분쟁을 겪기도 했다. 서유럽과의 관계를 개선할 필요성이 충분했다. 소련과의 협상은 예비 접촉을 거쳐 본격적인 협상 국면으로 전환됐다. 본격적인 협상은 에곤 바르의 몫이었다. 빌리 브란트는 전적으로 바르에게 협상 권한을 위임했다.
1970년 1월부터 5월까지 3번의 협상과 14번에 걸친 회담 대표와의 만남, 그리고 40여 시간의 밀고 당기는 과정을 거쳤다. 소련과 서독의 관계에서 브란트의 인간적 매력이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1971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조르주 퐁피두 프랑스 대통령에게 “독일보다는 독일 총리를 더 신뢰한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모스크바 조약’이 체결됐다. 주요 내용은 △긴장 완화 △무력 위협 포기 △국경선 존중 등이다. 서독과 소련의 모스크바 조약은 동서 긴장 완화의 기초가 되었고, 1975년 유럽의 다자간 안보협력을 제도화한 ‘헬싱키 프로세스’의 근거를 제공했다.
동유럽 국가와의 관계 개선도 동방정책의 중요한 구성 요소다. 우리는 한 장의 사진을 기억한다. 1970년 12월,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추모비 앞에서, 브란트는 무릎을 꿇었다. 그는 말했다. 인간의 말이 소용없을 때, 가슴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라고. 독일을 대신해서 그는 폴란드 국민에게 사과했다.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쓴다.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무릎을 꿇지 않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무릎을 꿇었다. 폴란드와 다른 유럽 국가들은 과거의 독일을 용서했다. 그리고 미래의 유럽에 독일이 참여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스크바 조약과 동유럽 국가와의 관계 개선은 동독의 처지에서 대화 압력으로 작용했다. 이미 동방정책의 성과가 드러나는 상황에서 동독만 고립될 수 없었다. 그래서 브란트와 바르의 동방정책은 단계적이고 실용적이지만, 사실은 대단히 공세적인 정책이었다. 동·서독 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협상에 또다시 바르가 나섰다. 실무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1972년 5월 교통조약이 체결됐다. 서독 국민의 동독 여행 절차 간소화가 주요 내용으로, 인적 교류와 긴장 완화를 촉진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1972년 12월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됐다. 브란트 정부는 동·서독 관계 정상화와 상호 협력을 위해 동독의 실체를 인정했다. 기본조약은 국제법상 조약으로 동독의 국가 승인, 유엔 동시 가입, 상주 대표부 설치를 뼈대로 하고 있다. 상대를 인정한 것이 통행 규제 완화, 이산가족 재결합, 우편물 교환 같은 협력의 기초가 되었다. 이후 동·서독은 상주대표부를 설치했다.
외교부가 의도적으로 기밀 누설분단의 현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오랜 적대적 관계가 만들어낸 고정관념을 뛰어넘어야 한다. 미래를 향한 전진에, 갈등은 불가피하다. 빌리 브란트는 과거와 적당히 타협하지 않았다. 기득권과 부딪치고 투쟁했다. 동방정책은 엄청난 국내적 반발을 무릅쓰고 추진한 것이다. 우선적으로 공무원들이 저항했다. 브란트 정부가 들어선 이후 18개월간 서독 외교부가 의도적으로 기밀을 누설한 사례는 54건이나 되었다.
결정적 사건은 소련과의 모스크바 회담 내용을 보수 성향의 신문 가 폭로한 것이다. 동독을 실제적 국가로 인정하고,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폴란드 국경선으로 인정해 과거 독일 제국의 영토였던 이 지역을 영원히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야당이 들고일어났다. 실향민들을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은 브란트를 반역자로 규정했고, 영토를 팔았다고 비난했다. 결국 야당인 기민당과 기사당은 불신임 투표를 제기했다.
당시 사민당과 자민당 의원 10명이 탈당해서 기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의석수는 사민·자민당이 250석, 기민·기사당이 246석이었다. 그러나 자민당의 몇몇 의원이 이미 불신임안을 지지할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불신임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기민당 대표이며 불신임안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라이너 바르첼은 통과를 확신했다. 투표 이틀 뒤에 소련과의 재협상을 위해 항공편을 예약했고, 집권 이후 외교정책의 방향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1971년 4월27일에 치러진 불신임 투표는 야당의 패배였다. 단 1표 차이였다. 기민당의 개혁파 의원 3명이 반대표를 던진 것이다. 브란트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정치인은 주위의 근거 없는 칭찬이나 비난에 마음을 쓰기보다는, 역사를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용기를 가지고 일관성 있게 일을 추진하면 결국 국민도 그 뜻을 알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불신임 파동을 거치면서 소련과의 모스크바 조약, 폴란드와의 바르샤바 조약이 통과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72년 총선거에서 사민당은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단 1표 차이로 ‘불신임’ 부결비전을 가진 지도자가 역사를 바꾼다. 위대한 정치는 시시때때로 변하는 여론에 춤추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로 여론을 선도한다. 그리고 합의를 명분으로 현실과 타협하지도 않는다. 역사적 책임감을 앞세우고,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 용기를 지닌 정치인을 이 땅에서 만나고 싶다. 과거로 역행하는 남북관계를 보면서, 빌리 브란트 같은 지도자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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