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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사고는 끝나지 않았다

원전 반대를 후쿠시마 차별로 비난하는 일본 내셔널리즘…국경 없이 밀항하는 체내 피폭 위험에 무관심한 한국 사회
등록 2011-10-20 10:55 수정 2020-05-03 04:26
» 지난 9월19일 일본 도쿄에서 ‘원전과 작별하기 위한 5만인 시위’에 참석한 사람들이 “원전보다 생명”을 외치고 있다. 한겨레 정남구

» 지난 9월19일 일본 도쿄에서 ‘원전과 작별하기 위한 5만인 시위’에 참석한 사람들이 “원전보다 생명”을 외치고 있다. 한겨레 정남구

일본을 대표하는 옛 도시 교토에서는 매년 8월16일이 되면 전통 행사 ‘고잔노오쿠리비’(五山送火)가 열린다. 교토에 자리한 5개의 산에서 불을 일으켜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는 풍습이다. 산 쪽에서 타오르는 불꽃 모습은 관광객에겐 장관이다. 그런데 교토의 대표적 관광상품인 이 행사를 둘러싸고 올해에는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불을 일으키려고 사용하는 나무가 문제였던 것이다. 주최 쪽은 원래 지진해일로 피해를 입은 이와테현의 소나무를 사용하기로 했다. 지진해일로 죽은 망자들의 혼을 달래고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로한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불쏘시개로 사용할 이와테현 소나무의 오염이 문제가 되었다. 방사성물질이 부착된 이와테현 소나무를 불태우면 교토시에 피해가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주최 쪽은 이런 우려를 받아들여 이와테현 소나무 사용 중지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합리적이고 시기적절했다. 실제로 나중에 검사해보니 사용할 예정이던 이와테현 소나무에서 방사성 세슘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반발이 터져나왔다. 이와테현 소나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원전 피해자들에 대한 차별이라는 것이다. 이런 예는 교토에 한정되지 않는다.

일본은 하나다?

후쿠시마 농가를 도와주려고 규슈의 후쿠오카는 지난 9월17일 도심에서 후쿠시마 생산물을 판매하는 가게를 열기로 했다. 그런데 이도 중지됐다. 후쿠시마에서 생산된 식품 등이 방사성물질에 오염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아이치현 닛신시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닛신시는 후쿠시마 피해자를 도우려고 닛신시에서 개최하는 불꽃놀이에 후쿠시마산 폭죽을 사용하기로 했다가 시민들의 항의로 중지했다. 후쿠시마에 인접한 이바라기현 쓰쿠바시에서는 후쿠시마 피난민 600명에게 방사성물질 포함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검사증명서 제출을 요구했다가 큰 소동이 일어났다.

후쿠시마에 대한 거부 반응이 일본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런 거부 반응은 방사성물질 공포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이 공포가 원전 반대 운동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거의 매일 전국 어딘가에서 원전 반대 집회가 열린다. 지난 9월19일에는 도쿄 도심 신주쿠에서 약 6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항의 집회가 열렸다. 노동조합 등의 조직 동원에 의존하지 않는 대중 집회다. 원전 반대에 소극적인 노동조합을 대신해 청년과 주부 등이 대거 참가한,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색적인 집회였다. 게다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와 문예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 같은 명사가 데모 참가를 독려했다. 원전 반대 운동의 효과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찌됐든 원전 54기 중에 현재 가동 중인 원전은 14기에 불과하다. 원전 14기만으로 전력 수요가 가장 많은 여름을 지냈다. 그런데 이런 후쿠시마에 대한 거부 반응, 원전 반대 운동을 후쿠시마에 대한 차별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원전 반대’를 ‘차별’이라 비난하는 구도에는 몇 가지 논리가 동원된다. 하나는 ‘같은 일본인’이라는 논리다. 후쿠시마산 식품에 방사성물질이 부착됐다고 해도 같은 일본인이니 고통을 나눠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뉴스 캐스터 미노 몬타가 “한심하다. 일본이 하나로 뭉쳐야 할 때인데 이런 차별이 있다니” 하며 한탄하는 것은 이런 심정을 대표한다. 마치 1945년 패전 직후 일본에서 퍼져나간 ‘1억 총참회론’을 연상시킨다.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천황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해 난국을 돌파해가자’는 논리와 유사하다. 내셔널리즘의 논리다.

둘째는 소비자와 생산자의 고통분담론이다. 후쿠시마 등 원전 지대가 ‘방사선 피해’라는 위험을 감수하며 도시 생활자에게 전기를 공급해왔는데, 이제 와서 도시생활자가 후쿠시마 등 원전 지대를 차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이른바 생산자와 소비자의 고통 분담인 셈이다.

셋째는 방사성물질 공포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소문에 기인하며, 이런 소문이 후쿠시마에 대한 차별을 낳는다는 논리다. 예를 들어 문부과학성은 지난 8월19일 소책자 를 교육 현장과 학부모에게 배포했다. 책자는 “3월17일 이후 방사성물질의 대량 방출은 없다. 따라서 3월17일 방사성물질이 몸이나 옷에 부착됐다고 해도 바로 없어진다. 구강 등을 통해 체내에 들어왔다고 해도 몸밖으로 배출된다”고 하고, 이어서 “보호자가 과잉 반응을 하면 아이들이 불안해져서 점차 안정을 잃게 된다. 따라서 정확하지 않은 정보와 지식, 소문 등의 풍문에 현혹돼서는 안 된다”고 맺고 있다. 원전 폭발 사고를 무색무취한 3월17일로 표기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방사성물질 공포를 과학적 근거가 없는 “정확하지 않은 정보와 지식, 소문 등의 풍문”으로 일축하는 것도 문제이다. 물론 원전 폭발 때와 같은 방사성물질의 대량 방출로 인한 직접 피폭, 혹은 체외 피폭은 현재로서는 없다. 핵무기 폭발이나 원자로로 인한 피폭을 체외 피폭이라 한다. 엑스레이 검사도 일종의 체외 피폭이지만 아주 미량이기 때문에 인체에 끼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고 한다.

» 지난 4월6일 충북 청원군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 연구원이 방사능 측정기로 일본산 식품의 방사능 농도를 검사하고 있다.

» 지난 4월6일 충북 청원군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 연구원이 방사능 측정기로 일본산 식품의 방사능 농도를 검사하고 있다.

“세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전 폭발 사고 이후 우려되는 것은 이른바 ‘내부 피폭’, 즉 체내 피폭이다. 방사선 분자는 폭발과 동시에 먼지 등에 부착돼 넓은 지역으로 퍼져나간다. 일부는 비가 되어 땅으로 되돌아오기도 하고, 공기 중을 떠돌아다니도 한다. 그리고 공기·물·식품 등을 통해 체내로 흡수돼 폐와 위 등을 거쳐 혈액으로 몸 전체로 퍼져나가, 체내 조직 어딘가에 부착돼 알파선이나 베타선 등을 장기간 방사하며 세포를 손상시켜 만성 질병을 시간을 두고 진행시킨다.

문부과학성은 체내 피폭의 위험성을 간단히 일축하고 있지만, 과학자들의 견해는 다르다.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ICRP)는 허용량 이하라면 문제없다고 하지만, 유럽의 과학자 단체인 유럽방사선리스크위원회(ECRR)는 내부 피폭의 경우는 허용량이 0이 아니면 안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ECRR는 1945∼89년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사망자를 무려 6160만 명으로 추정한다( 2011년 9~10월). 이 수치에는 직접 피폭으로 인한 사망자 수도 포함됐지만, 원전이나 이라크전쟁에서 사용된 열화우라늄탄으로 인한 간접 피폭, 즉 체내 피폭 등이 더 많이 포함됐다. 후쿠시마에 대한 거부 반응은 체내 피폭 공포에서 비롯됐다.

일본 정부와 자본, 과학자들은 한결같이 체내 피폭의 위험성을 무시한다. 체내 피폭의 공포가 원전 반대로 이어져 원전 폐기 같은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인은 하나’라는 내셔널리즘을 동원하고, 원전 반대 운동을 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세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지난 10월 10일 내가 몸담은 성공회대 동아시아 연구회가 주최한 토론회 ‘후쿠시마, 핵을 묻는다’에서 나와 함께 일본 원전 사태에 대해 발제한 이케가미 요시히코( 전 편집주간)는 지난 3월에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폭발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보며 느낀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 TV에도 반복해서 방영된 폭발 장면을 보고 후쿠시마가 아니라, 일본이 아니라, 세상이 끝난 것으로 생각한 그의 감성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아마 자신이 죽으면 세상이 끝난다는 실존적 감성은 아닐 것이다. 그는 핵에너지가 극단적 형태로 인류사회를 급습한 것으로 보았을 게다. 그는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다. 물론 냄새도 없다. 방사선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라고도 말했다. 그의 예상은 일단 빗나갔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때도 그랬던 것처럼, 세상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평소 생활로 돌아왔다. 심지어 사고를 당한 일본조차 이전 상태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온해 보인다. 지진해일로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들이 2만 명에 달하지만, 원전 폭발로 죽은 사람은 1명도 없으니 더욱 그러하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피폭 때의 직접적 사망자가 20만 명 이상이라는 점을 들어 이번 사고를 ‘통제 가능한 우연한 사고’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나간 ‘일본 문제’로 한정해

직접 피폭의 위험성이 일단 사라졌다고 해서 체내 피폭의 위험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반복해서 말하면, 방사성물질에는 국경이 없다. 사람은 여권과 비자를 통해 이동하지만, 방사성물질에는 국경이 없다. 공기 중이나 바다를 통해 떠다니다가 어딘가로 소리·소문 없이 ‘밀항’한다. 식품의약청은 일본산 식자재에 대한 방사선 검사를 철저히 한다지만, 일본산 식품이 한반도 거주자의 몸에 안착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 더구나 원전 사고 가능성이 일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원전이 밀집된 동북아시아, 특히 한국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여전히 국경의 틀로 가둬두고 한국 원전의 우수성과 안전성을 강조해 일본의 원전 사고와 분리시키려는 한국 정부의 처지 때문만은 아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일본 문제’로만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을 해양생물학자인 미즈구치 겐야가 “지옥의 문이 열렸다”고 말하고, 어느 역사학자가 “후쿠시마 이후”라 표현하는 것은 이 사태가 그저 우연한 사고로 치부할 수 없는, 즉 “세상이 끝났다”고 말할 정도도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미디어에서는 만이 이 문제를 ‘집요하게’ 추적할 뿐이다. 김종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전은) 현재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미래 세대의 삶의 토대를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극히 비윤리적 시스템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것이다.”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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