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을 떠날 때 내 발은 통퉁 부어 있었다. 유난히 불개미와 벌레들의 공격을 많이 받은데다 언제나 먼지로 덮여 있어서 염증이 생기고 고름이 멈추지 않았다. 그런 발로 베네수엘라의 국경을 넘고 히치하이킹을 해서 바나나를 실은 트럭을 얻어타고 첫 번째 도시인 산타 엘레나(Santa Elena)에 도착했다. 동네 사랑방 같은 작은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한 아저씨가 내 발의 상태가 심각해 보인다며 당장 병원에 가지 않으면 발을 절단하게 될 거라고 겁을 주었다. 물론 베네수엘라 사람 특유의 ‘오버’와 ‘과장’임을 알면서도 무서워서 당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는 소독하는 동안 빨간약을 두 통이나 썼고, 항생제 링거를 놓고도 약을 한 달치나 주었다. 모든 치료가 끝나고 돈을 내려고 수납 창구를 찾았지만 없었다. 사회주의를 실현하려는 베네수엘라에서는 병원이 모두 공짜였다.
발의 염증이 아물 무렵, 우리는 리오 카리베(Rio Caribe)라는 곳으로 향했다. 가까이에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천상의 낙원 메디나 해변이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찾아간다는 메디나 대신 아무도 안 가는 곳으로 가보는 게 어떨까? 언제나처럼 우리는 샛길로 빠졌고, 또다시 승합차 버스를 몇 번 갈아타며 이름 모를 해변을 찾아갔다. 가는 도중 동네의 유일한 일차선 비포장도로를 막고 있는 청소년들을 만났다. 사정은 이랬다. 그 동네 학생들은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너희의 권리를 찾으라’는 말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권리는 무료 통학버스였다.
이 시골 마을에는 정부가 마련해준 공공의 교통수단이 없었다. 당연히 승합차나 승용차를 가진 사람들은 영업허가증도 없이 마을의 교통을 장악하고 있었다. 찻삯은 비쌌고, 배차 시간은 운전사 마음대로였다. 동네 사람들은 막혀버린 도로에서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며 잘잘못을 가렸다. 그 와중에 어디선가 나타난 아이스크림 장수는 그날 그 자리에서 최고의 실속을 챙겼다. ‘투쟁’과 ‘아이스크림’, 어울리지 않았지만 워낙 초현실적 상황이 많이 벌어지는 남미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이 해프닝은 자신의 권리를 찾으라고 학생들에게 말한 선생님들이 학생에게 집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함으로써 2시간 만에 끝났다. 학생의 귀가를 도운 것은 다름 아닌 길가에 몇 시간째 서 있던 그들의 적 ‘불법 봉고차’들이었다. 집에 다 가서 돈이 없다고 그냥 내리는 학생들에게 사람들은 욕을 한마디씩 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것이 베네수엘라 스타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이름 모를 해변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의 흔적도 없을뿐더러 물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1km 가까이 되는 해변을 빽빽하게 가득 채운 코코넛 나무들뿐이었다. 나무마다 어른 머리통보다 큰 초록색 코코넛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머리에 떨어졌다가는 바로 의식을 잃을 듯했다. 우리는 우선 머리 위로 떨어질 코코넛이 없는 곳을 찾아 텐트를 쳤다. 우리가 가져간 물은 고작 1ℓ였지만 우리에게는 자연이 준 코코넛이 있었다. 금방 주변의 코코넛을 주웠는데 다섯 통이나 되었다. 다리오가 브라질에서 산 마체테(넓고 긴 정글용 칼로, 캠핑할 때마다 요긴하게 썼다)로 코코넛을 탁탁 쳐서 깨면 나는 그 물을 우리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알루미늄 냄비에 넣었다. 코코넛 물로 조리한 밥을 먹었고, 그날 밤 코코넛 물로 샤워를 했다. 어떤 비싼 뷰티살롱에서도 할 수 없는 특별 피부관리를 받은 셈이다. 피부가 촉촉해진 느낌이 들었다. 텐트 안에서 자는 동안 코코넛 냄새가 은은하고 달콤하게 퍼졌다.
바닷가에서 캠핑을 하면서 우리 텐트는 녹이 슬고 많이 망가졌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우리는 정성스럽게 텐트를 수리했다. 베네수엘라에서 간 첫 번째 대도시인 푸에르토라크루스에서 10달러 정도 주고 산 이 파란색 싸구려 텐트는 아주 편안한 안식처였다. 텐트는 우리와 1년 넘게 남미 여행을 함께했다. 안데스의 해발 4천m 고지에서도 안전한 집이 돼주었고, 비바람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었다. 사람들 눈엔 더 이상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아 보이겠지만, 우리는 이것을 버리고 새것을 살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조금씩 고쳐주면 언제나 그렇듯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쓸 만했다. 우리에게는 완벽한 것이 어울리지 않으니, 이 텐트는 우리 집임이 틀림없다.
지와 다리오 ‘배꼽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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