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낙처럼 어수선하게 되지 않기를, 종로서적처럼 망하지 말기를
▣ 브뤼셀=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요즘엔 인터넷을 통해 책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5~6년 전엔 주로 시내 대형서점에서 책을 샀다. 그중에서도 종각역 옆의 종로서적과 광화문의 교보문고는 즐겨 찾던 공간이었다. 두 곳 모두 대형서점인 것은 분명하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내 경우 책을 사야 할 일이 있으면 종로서적으로 향했고, 친구들을 만나거나 시간을 ‘죽여야’ 할 일이 있으면 교보문고로 향했다.
종로서적은 단위면적이 좁은 대신 층별로 책을 분류해놓아서 책을 찾는 동선이 비교적 짧았다. 또한 소음도 적고 혼잡스러움도 덜해 마음 편하게 책을 고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 교보문고는 공간은 널찍하지만 문구류와 공연 예매처, CD 매장 등이 입구를 장악하고 있어 어수선하고 들뜨기 쉬운 분위기였다. 책을 고르는 동선도 평면으로 배치돼 있어 심리적 이동 거리는 종로서적보다 더 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럽에도 ‘워터스톤’이나 ‘프낙’처럼 대형서점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처음 프낙에 가본 것은 2001년 겨울이었다. 당시 파리 시내 중심부 지하 쇼핑상가에 자리잡은 프낙을 처음 본 느낌은 “서울의 교보문고를 파리에 옮겨놓았구나” 하는 것이었다. 현대식 인테리어에 각종 서적이 수평 동선으로 구비돼 있는 것은 물론 CD 매장과 액세서리 매장이 함께 있는 것도 비슷했다. 그때 나는 현란한 분위기에 매혹돼 책을 고르기보다는 내부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빠져 있다가 결국 책 한 권 구입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나오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 2003년 가을에 다시 파리에 가게 됐을 때는 카르티에 라탱 구역 끝자락에 있는 ‘지베르 조셉’에 들르게 됐다. 사고 싶은 책이 있던 차에 마침 아는 친구가 프낙보다는 지베르 조셉이 더 괜찮다고 추천해줬기 때문에 가게 된 것이다. 처음 그곳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감동은 잊지 못한다. 바로 한국의 종로서적을 그대로 옮겨놓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다소 퇴락한 건물에 층별로 전시된 책 공간은 종로서적 그대로였다. 잡스러운 액세서리 판매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책의 자리를 대신할 정도로 무례하지 않다는 것도 종로서적과 같았다.
다소 어수선한 프낙과 달리 지베르 조셉은 정말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 찾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비좁고 답답한 틈새에서 서가에 꽂힌 책을 하나하나 음미한다는 것은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하지 못하는 일인데, 이곳의 독서 마니아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인 듯했다. 나도 그곳에서 서가를 옮겨다니며 한참을 즐기다가, 마침내 갈리마르에서 나온 레이몽 아롱의 를 구입했다. 1권은 품절이어서 아쉽게도 구입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벨기에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뿌듯한 느낌에 젖었던 기억이 난다. 바로 지베르 조셉이라는 친구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런 뿌듯함을 벨기에에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참 유감이다. 물론 브뤼셀에도 대형서점은 있다. 바로 프낙이다. 시내에 나갈 일이 있으면 나도 프낙에 종종 들른다. 하지만 이곳에서 책을 사는 일은 거의 없다. 종로서적이나 지베르 조셉처럼 나를 자극하는 그 무엇인가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 가본 프낙은 대형 TV를 비롯해 각종 컴퓨터와 CD 판매대가 입구 전면을 몽땅 차지해버렸다. 책이 차지하는 공간은 전체 면적의 절반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록 줄었다. 명목상 서점이지 이곳이 과연 서점인지 전자제품 상점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종로서적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보니 2002년 그곳이 문을 닫게 되었다는 기사를 보았을 때 나는 한동한 우울했다. 애정이 각별한 것은 아니었지만 프낙이 점차 전자제품 매장화돼가는 것을 보니 점점 더 서글퍼진다. 아직 구매하지 못한 전쟁론 해설서 1권은 언젠가 지베르 조셉에 직접 가서 살 작정이다. 고집불통의 지베르 조셉이 종로서적처럼 되지 않기를, 또 프낙처럼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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