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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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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에도 은방울꽃 향기를…

등록 2006-05-12 00:00 수정 2020-05-03 04:24

프랑스 최초고용계약에 대한 한 한국 언론의 ‘획기적’ 논평을 보며

▣ 파리=이선주 전문위원 peace@free.fr

5월1일은 노동절이다.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다. 노동자의 가두행진과 축제 등 각종 행사가 벌어진다. 이날은 행운의 꽃인 은방울꽃을 가까운 이들에게 선사하는 풍습도 있다. 이즈음이면 도처에서 만발하는 은방울꽃이 봄과 행운을 전한다고 여기는 전통은 오래됐고, 거기에 같은 시기에 벌어지는 축제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것이다. 그렇게 5월은 늘 은은한 은방울꽃 향기와 노동의 의미가 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시작된다. 특히 올해는 지난 3월 내내 프랑스 사회와 정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최초고용계약’(CPE) 사태(<한겨레21> 603호 참조)가 노동자들이 원하는 쪽으로 마무리된 직후에 맞은 노동절이어서 옛날과 다른 활기가 느껴진다.

그렇다. 최초고용계약법 실행을 반대한 학생들과 노동운동 진영은 ‘승리’했다. 의회에서 통과되고, 헌법 상임위원회가 승인까지 하고, 대통령이 공포한 법이지만 실행되지 않은 채 ‘덜 불안정한 내용의’ 새로운 고용법으로 대체될 예정이다. 반면 300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뛰쳐나와 반대를 외쳤던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프랑스 사회의 권력과 민중 간의 대화 부재와 힘의 대립을 또 한 번 실감했다. 혁명으로 사회를 바꾸어놓았던 68혁명과 시민혁명이 이랬을까 싶기도 했다. 그야말로 힘으로 밀어붙인 정책에다 그에 걸맞게 힘으로 밀어붙인 반대급부였다. 그래서 ‘정책 협상’이 아닌 문자 그대로 ‘투쟁’이었고, 그것으로 얻어진 ‘승리’였다.

계급, 투쟁, 승리…. “마르크스는 죽었다”고 외쳐대는 이 시대에 들먹거리기엔 다소 어색한 감이 들기도 하는 단어들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걸맞은 노동의 의미는 무엇일까? 바꿔 말해, 신자본주의 시대에 걸맞은 사회민주주의 정책은 무엇일까? 이 시대가 고찰해야 할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최초고용계약법 사태를 이런 ‘잡념’으로 지켜보다가, 문득 눈길을 스친 글들이 있다. 바로 ‘프랑스식’ 고용정책 진전(혹은 후진) 상황을 보는 외국 언론들의 시각이다. 해당 언론이 소속된 나라의 노동문화가 나름대로 묻어나고 있어서 흥미롭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프랑스인들은 과거를 향해 걷는다”(4월10일치)고 썼다. 1980년대 마거릿 대처 집권기에 고용법을 대거 ‘개혁’한 바 있는 영미식 자본주의의 원천지다운 시각이다. “난 프랑스를 좋아하지만, 프랑스는 시대를 역행한다”는 논조는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친자본주의자들의 가장 대표적인 시각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복지사회의 모델로 칭해지는 나라 스웨덴의 한 기자는 “왜 26살을 기준으로 그 이상과 이하로 나눠 고용책을 차별하는가? 왜 대화로 협상하지 않고 힘으로 밀어붙이는가”라면서 더 평등적인 관점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읽은 것 중 가장 획기적인 논평은 바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복지와 고용 시스템은 한번 혜택을 올리면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권이 함부로 선심 쓸 대상이 아니다. 이미 기득권으로 굳어진 혜택을 누가 쉽게 포기하겠는가. 프랑스같이 세대 간 갈등으로 번지면 대응하기도 고약하다. ‘자기들은 다 누려놓고 왜 우리 세대에겐 고통을 강요하느냐’는 젊은 세대의 항변을 공권력으로 누르기도 어렵다….” 한국의 한 신문에 실린 글이다. 삭막한 어조의 이 글에선 평등과 차별에 대한 까다로운 고민이나 대화의 갈망은 전혀 묻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한국 노동자가 처한 조건의 가장 암울한 면을 방증하는 글이라고 볼 수도 있어 마음이 아프다.

노동의 역사는 곧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19세기 말 급격히 발전하는 산업사회에 새롭게 대두했던 노동문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마구 충돌하던 시기에 ‘화해’를 외쳤던 교황 레오 13세의 말과 함께 한국 노동계에도 은방울꽃의 은은한 향내를 전하고 싶다. “노동 없는 자본은 아무것도 아니며, 자본 없는 노동도 마찬가지다. 각기 서로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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