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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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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도 통역이 되나요?

등록 2006-02-17 00:00 수정 2020-05-03 04:24

기업·방송사 코디네이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난 인간 군상들

▣ 브뤼셀=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유학생으로 살다 보니 살림살이가 늘 빠듯하다. 그래서 가끔씩 아르바이트를 한다. 주로 하는 일은 번역, 방송사 현지 코디네이터, 통신원, 박람회 도우미, 출장 기업인 통역자 등이다. 명칭은 다르지만, 필연적으로 외국어 통역이 소용되는 일들이다.

한국에서 통역을 의뢰하는 고객이 오기로 결정되면 어떤 일로 오는지를 상세히 물어보고, 사전 작업을 한다. 기업인이 올 경우는 접촉할 업체와 연락해 만날 날짜를 잡기도 하고, 방송사에서 올 경우는 취재원과의 약속은 물론 현지 답사까지 미리 해두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몇 차례 일하다 보니 여러 가지 아쉬운 모습을 보게 된다.

우선 시간에 닥쳐서 무리한 사전준비를 요구하는 경우다. 한 방송사의 프로그램의 경우, 3일 뒤 벨기에에 도착할 테니 그 안에 인터뷰 장소와 스케줄을 모두 잡아놓고 대기하고 있으라는 주문을 했다. 물론 사정이 있어서 급하게 시간을 잡았겠지만, 최소한 1주일 전에 사전 예약을 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접촉하기 힘든 유럽의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하는 요구다. 게다가 부활절이나 여름철 휴가 기간이 끼어 있을 경우는 거의 불가능한 요구다. 심지어 해외토픽에서 본 업체를 대강 설명만 해주고는 벨기에에서 찾아내라고 하는 방송작가도 있었다. 막상 그들이 현지에 도착했을 때에도, 카메라맨들은 카메라를 들이대면 모두가 두 손 들고 환영할 것이라는 다소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지, 종종 영업에 방해가 되거나 상대에게 실례가 되는 카메라 워크를 시도할 때도 있다.

또 다른 경우는 현지인 앞에서 한국말로 욕을 하는 경우다. 주로 사업차 온 사람들한테 보게 되는데, 협상이 잘 안 되거나 대화가 겉돌면 상대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자기들끼리 한국말로 상소리를 하는 것이다. 설령 현지인이 한국말을 모른다 하더라도 분위기와 표정만으로 대화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해외영업 담당자임에도 국제거래에 대한 법률적 지식이 전혀 없거나 서류 준비에 소홀한 경우도 있다. 그런 거래가 제대로 성사될 리 없다. 이런 때는 한국에 돌아간 뒤에도 미비한 서류나 일처리 때문에 통역자에게 다시 전화해 추후 업무를 부탁하기도 한다. 이 경우 업무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는 통역자는 다소 매정하지만 거절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 보는 실례는 출장 지원비를 줄줄 흘리고 가는 경우다. 정부의 지원을 받거나 공공단체에서 후원을 받은 경우가 대부분인데, 금전적 낭비일 뿐 아니라 성과도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모기관에서 경비를 지원받아 무역박람회에 온 기업인들이 있었다. 개중에는 박람회의 성격과 전혀 맞지 않는 상품을 들고 온 업체가 몇 있었다. 엉뚱한 물건을 가져왔으니 박람회에 임하는 충실도도 떨어지고 성과도 좋을 리 없다. 또 유로 존으로 출장을 오면서 모든 경비를 미국 달러로 들고 오기도 한다. 이때는 다시 현지에서 달러화를 유로화로 바꿔야 하는데, 결국 환전수수료를 이중으로 지불하는 셈이다. 때로는 유로화 대신 달러화로 계산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당연히 달러를 가진 쪽에서 손해를 보면서 지불해야 한다. 그렇게 줄줄 세는 돈을 보게 되면 통역자도 그들을 가볍게 여겨 높은 보수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결국 그들에게는 이중의 손해가 되는 셈이다.

짧게는 몇 시간에서 길게는 며칠에 걸친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대개는 후유증이 온다. 많이 돌아다니면서 생긴 육체적인 피로와, 일처리가 미숙한 의뢰인들을 보고 느낀 아쉬운 마음 때문에 생긴 정신적 피로다. 물론 관심 분야가 일치하거나, 치밀하고 센스 있는 의뢰인을 만나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런 경우는 현장 경험이 되어 값진 공부를 하는 셈이니 아무리 힘들어도 피로하지 않다. 그런 의뢰인을 자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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