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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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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호들은 지금 스위스로 간다

등록 2005-11-24 00:00 수정 2020-05-02 04:24

세금 문제 피하려 너도나도 향하지만 가난한 외국인에겐 가혹

▣ 제네바=윤석준 전문위원 semio@naver.com

최근 세계은행(World Bank)이 발표한 ‘국부는 어디에 있는가?’(Where is the Wealth of Nations?)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스위스는 국민 한 사람당 평균 64만8214달러의 자산을 보유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나타났다. 조사 대상 120개국 중 스웨덴, 덴마크, 미국 등 여타 부국들을 멀찌감치 따돌렸음은 물론이고, 이 조사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평가된 에티오피아 국민의 1인당 평균 자산 1965달러에 비해서는 무려 300배나 많은 수치다.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나 ‘세계 제일의 부자 나라’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다.

그런데 ‘부익부 빈익빈’이라고 했던가, 그렇지 않아도 세계 최고의 부자 국가인 스위스에 최근 몇 년 전부터 다른 나라의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속속 새로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미 세계 최고 부호로 손꼽히는 스웨덴의 이케아(IKEA) 창업자인 잉그바르 캄프라드, 독일의 포뮬러원(Fomula-1) 스타 미카엘 슈마허, 독일 축구의 전설 프란츠 베켄바우어, 미국의 인기 팝가수 티나 터너 등이 스위스로 주거지를 옮겼으며, 그 외에도 수백 명의 세계적 부호와 고소득자들이 그들의 조국을 떠나 스위스로 이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들의 스위스 이사를 위한 전문회사들이 생겨날 정도다.

이들이 스위스에 둥지를 트는 것은 단순히 스위스의 아름다운 자연환경, 안전한 치안 문제, 뛰어난 교육제도 등의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이 부호들의 모국도 이러한 조건들을 갖춰줄 수 있는 이른바 선진국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스위스행을 강력히 이끄는 근본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세금 문제’ 때문이다. 스위스는 최근 외국인 부호들 사이에서 세금을 적게 낼 수 있는 ‘부자들의 안식처’로 통하고 있다.

물론 예전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스위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인근 국가들이 유럽연합(EU) 회원국들 간의 조세 균등화 정책으로 인해 세율을 통합하다 보니, 비유럽연합 회원국인 스위스의 세금이 상대적으로 낮아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스위스의 각 칸톤(다른 나라에서 주에 해당하는 스위스의 지방자치 행정단위)들이 재정 확충 등을 이유로 외국인 부호 유치에 열을 올리면서 칸톤 정부 간 세금 할인 경쟁마저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외국인 부호 유치 경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대학원생인 수잔나(26)는 “내국인에 대한 ‘역차별’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특히 스위스에 거주하는 ‘가난한’ 외국인들의 목소리에서는 한숨이 묻어나온다. 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에서 온 아키이심(36)은 “벌써 3년째 고국에 있는 아내와 두 아들을 만나지 못했다”며 “야간에 호텔에서 밤샘 일을 하면서 낮에는 대학원을 다니는데, 수입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가족에 대한 비자 발급을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말한다.

세계화의 거센 물결이 지나간 오늘날, 자본의 이동에 대한 국가별 장벽은 한층 낮아졌지만 사람의 이동에 대한 장벽은 그다지 낮아진 것 같지 않다. 어쩌면 사람이 돈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돈이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형국이 돼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제네바의 레만호 주변에는 수많은 요트들과 그 뒤 언덕을 배경으로 그림 같은 빌라들이 단풍과 어우러져 있다. 하지만 그들이 모국에서 내야 할 세금을 내고 이곳에 왔다면 그 풍경이 더 아름답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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