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밝히자면 나는 두산 베어스 팬이다. 1990년대 (야구팬이었던) 나는 우울했다. 두산 베어스의 성적은 다소 뜬금없이 우승한 1995년을 제외하곤 암흑기에 가까웠다. 특히 ‘잠실 라이벌’ LG 트윈스와 견주면 더 참담했다. 잘나가는 청년 같은 LG와 달리 두산 베어스의 이미지는 매력 없는 우울한 아저씨 같았다. 두산 에이스 김상진이 라이벌이던 LG 에이스 이상훈에게 늘 한 끗 차이로 패할 때마다, 그깟 공놀이가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직접 확인해야 했다.
2000년대 들어서며 상황은 나아졌다. 2010년대 들어 대거 유입된 젊은 여성팬들로 구단 이미지는 젊어졌다. 성적 역시 악몽의 90년대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역전됐다. 다소 건조하게 ‘역전’이란 표현을 썼지만 두산이 우승에 도전하는 팀이라면 LG는 플레이오프 진출이 우선순위인 팀이 되었다. 멤버 개개인의 기량 차이도 있다. 냉정하게 말해 지금 LG 트윈스에서 박용택 정도를 제외하고는 ‘두렵다’는 느낌을 주는 타자는 몇 없다. 무엇보다 잠실에선 장타를 치지 못하는 LG 타자는 두렵지 않다.
어제 LG 트윈스의 정성훈이 방출됐다. 두산 팬 입장에서 여전히 두려운 ‘몇’에 해당하는 타자여서 놀라움은 더 크다. 해태 타이거즈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정성훈은 현대 유니콘스를 거쳐 LG 트윈스에서만 9년을 뛰었다. ‘해태’란 말에서 알 수 있듯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한 노장이고, 강산이 한 번 바뀔 동안 LG에서 뛴 대표 타자다. LG 트윈스는 올 시즌이 끝나고 류중일 감독을 새로 선임하고, 전임 감독 양상문을 단장으로 승진시키는 변화를 감행했다. 감독과 단장이 바뀐 만큼 선수단 구성을 새로이 하는 건 어느 정도 필연적이다. 하지만 정성훈의 방출이 이 필연에 해당하는지 구단을 제외하곤 모두가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일단 올해 LG에서 정성훈보다 성적이 나은 선수는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최근 몇 년을 봐도 박용택을 제외하곤 정성훈보다 나은 타격을 보여준 선수는 몇 없다.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노장 선수를 내치고 신인을 기용하는 리빌딩(재건축)이 성공한 사례는 그리 흔치 않다. 잘못되면 오히려 더 긴 암흑으로 이어지곤 한다.
성적보다 지금 정성훈의 방출이 더 문제되는 건 선수를 대하는 구단의 태도 때문이다. 9년 동안 좋은 성적을 올리고 저렴한 금액으로 빠르게 자유계약(FA)을 해주며 팀에 헌신한 선수에게 구단은 어떤 협의나 배려 없이 일방적으로 방출을 통보했다. 선수는 충격으로 제대로 인터뷰를 못할 정도다.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큰 대우를 바라지도 않고 연봉 삭감도 다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던 선수였다.
LG는 늘 이렇게 베테랑을 내쳐왔다. 이진영을 그런 식으로 KT 위즈로 보낸 게 불과 얼마 전이다. 이상훈, 김재현, 유지현 등 노장 홀대가 구단의 전통이냐며 자조하는 팬들이 있을 정도다. 사실 이건 LG만의 문제가 아니다. 두산을 비롯해 대부분의 구단이 오랫동안 팀에 헌신해온 선수를 너무나 쉽게 내쳐왔다.
프로 구단은 성적만으로 유지되는 건 아니다. 정성훈과 LG 팬들이 9년간 쌓아온 추억은 구단에 의해 갑자기 강제 종료됐다. 냉정한 게 프로의 세계라지만, 그 냉정함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김학선 스포츠 덕후 겸 음악평론가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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