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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서비스도 국가대표급으로

심판 매수와 뇌물로 뒤숭숭한 한국 야구를 구할 방법
등록 2017-09-13 21:25 수정 2020-05-03 04:28
야구 실력과 팬서비스는 비례하지 않는다. 한겨레 김연기 기자

야구 실력과 팬서비스는 비례하지 않는다. 한겨레 김연기 기자

자신의 사인볼이 중고시장에서 판매되는 걸 보고 충격받았다고 한다. ‘국민타자’ 이승엽의 이야기다. 실제 이승엽 선수의 사인볼은 온라인 중고시장에서 5만~10만원 선에 거래된다. 이승엽은 그 사실을 안 뒤 팬들에게 사인을 잘 안 해준다고 했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사인 볼이 고가에 거래되는 건 그만큼 희소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흔할 정도로 사인을 많이 해주면 그런 거래는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다. 팬서비스 좋기로 소문난 일본 야구의 전설 오 사다하루는 “내 사인은 가치가 없어”라고 말할 만큼 밀려드는 사인 요청에 거절하지 않고 응한다.

‘3대장’이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팬서비스 좋지 않기로 유명한 세 선수를 말한다. 류현진과 이대호는 고정이고, 여기에 이병규나 이승엽의 이름이 번갈아 들어간다. 실력으로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선수들이지만 팬서비스 좋지 않기로도 한국을 대표한다. 일부 선수들은 사인 요청 거절을 넘어 팬들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여 원성을 사기도 한다. 한국에서와 달리 외국에 진출해서는 사인을 잘해줘 ‘내수 차별’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선수도 있다.

얼마 전 삼성 라이온즈의 박해민 선수는 팬서비스를 소홀히 한 것에 사과했다. 그는 동료 강한울과 구자욱 선수도 같은 뜻이라고 말했다. 팬들을 무시하고 사인 요청을 거부한 사실이 공론화되자 사과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1군 무대에서 뛴 지 5년 안 된 젊은 선수들이다. 젊은 선수들마저 이렇다는 건 구단에서 누구도 팬서비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들은 선배 이승엽이 사인을 거절하는 걸 보며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이 사태는 선수들 스스로 한국 프로야구가 기형적이라는 사실을 자인하는 것이다. 한국 프로야구가 대기업 회장들의 ‘펫(pet) 스포츠’임을 선수들이 자연스레 체득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회장님의 사인 요청을 거부할 선수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회장님들도 700만 관중이 있기에 돈 많이 들어가는 야구단을 운영하는 것임을 함께 알았으면 한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술 가운데 하나일 ‘공 빨리 던지는 것’과 그걸 ‘받아치는 것’에 열광해주는 팬들이 있기 때문에 기형적 구조에서도 한국 프로야구가 버티고 있다. 그래서 “갈수록 프로야구 선수들의 연봉이 올라가는데요. 그 연봉 속엔 팬서비스에 대한 부분도 포함돼 있다고 봐요. 그걸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박용택 선수의 태도는 특히 귀하게 여겨진다.

미국에서 뛰다 한국에 온 외국인 선수들의 팬서비스는 하나같이 훌륭하다. 사인은 물론이고 자신이 쓰는 장갑이나 배트를 주기도 한다. 두산 베어스의 닉 에반스 선수는 “어린 시절 야구장에 가서 선수들에게 장비를 선물받고 뛸 듯이 기뻤다”며 “그때의 경험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어린 팬에게 배트를 선물하고 “그저 선물 몇 개를 준비했을 뿐이다. 세상을 구하는 일도 아니다”라고 겸손해했다. 심판 매수와 뇌물로 뒤숭숭한 지금, 어린아이들에게 친절히 사인을 해준다고 세상을 구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한국 야구는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김학선 스포츠 덕후 겸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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