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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칩-룸 트리오와 야구팬

상대팀 선수 약점 들추는 ‘피로 싸움’
등록 2017-10-19 17:53 수정 2020-05-03 04:28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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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 타이거즈가 8년 만에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날, 가장 큰 한국 프로야구 커뮤니티엔 “오늘 약-칩-룸 트리오로 마무리되나요?”라는 글이 올라왔다. 우승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경기에 올라온 투수가 공교롭게도 ‘헥터(약물 복용)-불법 도박(임창용)-김세현(룸살롱 출입)’으로 모두 범죄나 부도덕한 행위로 입길에 오른 전과가 있기 때문이었다. 글을 보고 누군가는 묵직한 ‘팩폭’(팩트 폭력)이라 했고, 누군가는 부러움에 질투하는 글이라 했다. 어찌됐건 기아 팬들의 우승 기분을 초치기 위해 쓴 글인 건 분명했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약물 복용 전과 선수가 있는 팀의 팬들은 1년 내내 조롱당한다. 해당 선수가 홈런을 치거나 승리투수가 되는 날엔 조롱과 비아냥이 더욱 심해진다. 꼭 불타는 정의감 때문만은 아니다. 화풀이를 하거나 상대 팀 팬의 기분을 초치기 위한 목적도 크다. 프로야구가 열리는 시즌 동안 이 피로한 일들은 반복된다. 온통 중요한 경기로만 채워질 플레이오프 시즌 동안 이 비아냥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이런 조롱과 비아냥은 결국 서로에 대한 물타기와 응원 팀 선수들의 범죄 사실 거론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오늘 약-칩-룸 트리오로 마무리되나요?”라는 글을 쓴 사람은 한화 이글스 팬이었고, 그날 한화의 4번 타자 역시 약물 복용 전과가 있는 최진행이었다. 신생 팀인 KT 위즈 정도를 제외하고 그 어떤 구단도 범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도 각 구단의 팬들은 서로의 얼굴에 쉼 없이 침을 뱉고 물을 탄다.

이처럼 정의감에 불타는 듯한 야구팬들이 공통적으로 언급을 자제하는 사건이 있다. ‘병풍’이라 불린 2004년의 병역 비리 파동이다. 무려 70명의 선수가 사법 처리되거나 징병 검사를 다시 받았다. 8개 구단 선수가 모두 연루됐다. 각 구단의 주력 선수였고, 훗날 ‘레전드’로 불리는 선수도 여럿이다. 프로야구를 망하게 할 뻔했던 이 사건이 ‘본격 제 얼굴에 침 뱉기’란 사실을 아는지 한국 사회의 근간을 흔든 이 악질 범죄에 대해선 대다수 야구팬이 침묵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이라는 한국 프로야구의 선전 구호는 이미 저 멀리 날아가버린 지 오래라는 것을. 음주운전에 도박에, 후배들 구타하고, 약 빨고, 승부 조작하고, 군대 안 가려고 섬으로까지 도망간 선수들이 즐비한 곳이 한국 프로야구 판이라는 것을. 이 선수들은 여전히 현역으로 잘 뛰고 있고, 은퇴한 선수들은 지도자도 하고 해설도 하고 레전드 대접받으며 잘 먹고 잘살고 있다.

고약한 건 이런 상황에서 팬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누가 좀더 깨끗한가를 다투고 ‘나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으로 다른 구단 선수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뿐이다. 당장 오늘 밤 어느 구단 선수가 음주운전을 하거나 사고를 치면 ‘공수’가 바뀌어 누군가는 공격을 하고 누군가는 방어를 할 것이다. 서장훈의 말을 빌리자면,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솔직해지자. 만약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응원 팀의 사고 친 선수가 역전 홈런을 쳤을 때 기뻐하지 않을 팬은 없을 것이다. 치사하지만 그게 야구를 응원하는 팬의 숙명이다. 그 관대한 마음만이 이 피로한 ‘제 얼굴에 침 뱉기’ 싸움을 끝낼 수 있다.

김학선 스포츠 덕후 겸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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