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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짜노’를 없애야 한다

혹사 후유증으로 사라져간 투수들
등록 2017-09-22 01:47 수정 2020-05-03 04:28
두산의 ‘만년 기대주’ 성영훈이 역투하는 모습. 스포츠코리아 제공

두산의 ‘만년 기대주’ 성영훈이 역투하는 모습. 스포츠코리아 제공

두산 베어스에는 ‘민간신앙’이라 불리는 선수가 있다. 투수 성영훈. 2009년 두산 베어스의 1차 지명 선수로 고졸 신인 가운데 역대 다섯 번째로 많은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다. 150km 넘는 속구와 변화구를 던지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인터넷에는 아직도 그가 고교 시절 던진 엄청난 슬라이더 ‘움짤’이 전설처럼 떠돈다.

성영훈은 그 슬라이더와 속구로 한국을 넘어 세계를 제패했다. 제42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덕수고를 우승시키고, 제23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우승을 이끌며 MVP가 됐다. 팀 에이스로 3승을 거두며 평균자책점 1.32를 기록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만, 미국의 타자를 상대로 삼진 36개를 잡아냈다. 두산과의 계약금 5억5천만원은 그 기대의 방증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성영훈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건 물론 과장이다. 두산 베어스와 계약 뒤 성영훈은 가끔 1군 무대에 올랐다. 그의 프로 생활은 부상과 재활의 연속이었다. 1군에 올라 공을 던진 뒤 통증에 시달리거나 부상을 입었다. 2009년 입단해 9년 동안 그는 모두 28이닝을 던졌다. 두산 베어스 팬들이 성영훈을 ‘민간신앙’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가 완전한 몸 상태로 공 던지는 걸 간절히 보고 싶기 때문이다.

최고의 기대를 받던 초특급 고교 유망주가 이렇게 된 데는 고교 시절 혹사가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덕수고를 우승으로 이끈 대통령배 대회에서 그는 준결승전과 결승전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문제는 준결승전 이틀 뒤 결승전이 열렸다는 것이다. 준결승전에서 8.1이닝을 던진 그는 결승전에서 7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며 팀에 우승컵을 안겼다.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선 세 번 등판해 각각 8.1이닝, 9이닝, 9이닝을 던졌다. 대회 내내 그는 감기몸살에 시달렸고 미국과 결승전에선 고열에 팔꿈치 통증까지 있었다. 혹사는 그에게 MVP라는 훈장을 줬지만 프로 무대의 시련도 함께 안겼다.

이런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성영훈은 워낙 기대치가 커 그나마 아직까지 얘기라도 되는 것이다. 프로 구단 신인 투수 가운데 고교 시절 혹사 후유증으로 조용히 사라진 투수는 너무 많다. 당장 성적이 급한 현실에서, 감독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는 학원스포츠 시스템 아래서, 또 운동선수로서 승부욕 때문에 혹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분명 혹사를 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건 인권 문제기도 하다.

얼마 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역시 두산에 지명된 투수 곽빈이 미국을 상대로 8.1이닝 동안 144개의 공을 던졌다. 놀라운 기시감이다. 경기 뒤 나온 한 언론의 기사 제목은 ‘곽빈의 144구, 투혼인가 혹사인가’였다. 여기에 ‘투혼’이란 말을 쓰는 순간 모든 문제는 덮인다. 이건 명백한 혹사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롯데 강병철 감독은 7번 경기에서 무려 5번을 등판한 최동원 선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짜노, 여(기)까지 왔는데.” ‘우짜노’에 모든 현실적 이유가 담겼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우짜노’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김학선 스포츠 덕후 겸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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