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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먼의 조의에 응답하라

경기장의 불문율 ‘인종차별 금지’
등록 2014-05-10 18:16 수정 2020-05-03 04:27

야구는 복잡한 룰(Rule)을 가진 스포츠다. ‘공으로 상대 진영을 침투해 부순다’는 다른 구기 종목의 대전제와 달리 야구는 상대가 던지는 공을 때려 더 많이 집(home)에 돌아오는 팀이 이기는 이상한 게임이다. 축구와 농구가 인간의 본능에 따라 ‘발견’된 경기라면 야구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 ‘개발’된 경기에 가깝다. 인위적으로 개발된 게임엔 인위적인 문법(룰)을 입힐 수밖에 없다.
프로야구는 명문화된 규칙 외에도 많은 불문율이 있다. 메이저리그는 150년의 역사 속에서 선수들이 지켜야 할 불문율을 만들어왔다. 승부가 기울었을 때는 도루를 하지 않고, 과격한 홈런 세리머니를 자제할 것. 동료가 빈볼을 맞을 경우 반드시 보복구를 던지거나 벤치 클리어링시 꼭 합류할 것. 언제나 전력질주를 해야 하고, 불필요한 행동으로 팬들을 자극하지 말 것 등. 불문율은 규칙과 더불어 선수들이 지켜야 할 야구장의 윤리가 되었다.
모든 종목에 공통된 최고의 불문율은 인종차별을 금하는 것이다. 이를 위반할 경우 상대의 응징은 물론 동료의 냉대까지 감수해야 한다. 지난해 한화 이글스의 김태균은 인터뷰에서 롯데 자이언츠의 흑인 투수 셰인 유먼에 대한 인종주의적 농담을 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여론이 악화되자 그는 구단을 통해 “본의가 아니었다”며 사과했다. 나는 김태균이 본의가 아니었음은 믿지만 그가 사과를 했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 김태균이 유먼에게 직접 사과를 했다는 소식은 끝내 듣지 못했다. 구단을 통한 사과는 여론을 의식한 제스처에 지나지 않았다. 김태균이 사과했어야 할 대상은 누리꾼이 아니라 유먼이었다. 유먼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태균이 농담(joke)으로 한 말이었을 것이다”라며 태연한 척했지만, 한 영자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끝내 사과하지 않는 김태균에 대한 실망을 털어놓았다(더불어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은 자신의 소속팀 롯데에도).
지난 4월23일, 승리 투수로 경기 뒤 인터뷰를 하던 유먼은 인터뷰를 마치려는 아나운서에게 마이크를 요구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로 마음이 아프다. 야구장에서 야구를 하면서도 피해자들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그들을 돕고 싶다”며 한국에서 벌어진 비극에 진심 어린 조의를 표했다. 유먼의 말에 방송 중계 캐스터는 한동안 목이 메었다.
유먼의 인터뷰를 보며 다시 김태균을 떠올린다. 타국에서 온 용병은 한국인의 비극에 이토록 간절한 진심을 표하지만, 불문율을 깬 한국의 4번 타자에게는 여전히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있다. 선후배 간의 예의를 지키고 심판에게도 모자를 벗어 인사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 없는 한국 프로야구의 따뜻한 불문율이다. 그러나 아직 외국에서 온 선수들에 대한 불문율은 없는 모양이다.
지난 1년간 유먼은 김태균에게 빈볼을 던지지 않았다. 아직 김태균의 사과를 기다린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김태균과 우리는 유먼이 보여준 따뜻한 마음에 늦게라도 응답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150년의 역사까지도 필요 없는 프로야구의 최소한의 윤리다.

김준 사직아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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