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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이 졌다

파퀴아오 vs 메이웨더, ‘세기’의 대결?
등록 2015-05-14 16:32 수정 2020-05-03 04:28
한겨레 자료

한겨레 자료

파퀴아오와 메이웨더의 대결은 복싱 역사상 숫자에 관한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다. 현대 복싱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의 정면충돌에 전세계가 흥분했고, 미국인들은 별도의 시청료까지 결제하며 승부를 기다렸다. 장르를 불문한 21세기의 거물들이 링사이드 주변에 진을 쳤고, 복싱팬이 아닌 사람들도 이 전세계적 흥분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TV 앞에 모였다. 그리고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사실 언론의 호들갑과 달리 복싱팬들에겐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졸전이었다. 최고의 연타 능력을 갖춘 인파이터와 최고의 수비력을 지닌 아웃복서의 시합은, 누군가 주먹의 사정거리를 포기하는 순간 복싱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수 있다. 메이웨더는 그 초인적인 스피드를 도망가는 것에 썼고, 쫓아가서 때리기엔 파퀴아오도 늙어 있었다(물론 경기 뒤 알려진 어깨 부상도 원인이었을 것이다).

절대다수의 팬들은 파퀴아오를 응원했다. 물론 가난한 소년 파퀴아오가 만들어온 인간 승리의 드라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파퀴아오가 재벌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파퀴아오가 지지받은 이유는 그가 복싱이라는 종목의 오랜 로망을 구현해낸 고전적 히어로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끝없는 전진 스텝으로 상대를 쓰러뜨리고, 때로 카운터에 걸려 실신 KO패를 당하기도 하는 파퀴아오의 인파이팅은 복싱이 줄 수 있는 최대치의 쾌감을 선물해왔다. 복싱팬들이 파퀴아오를 응원한 것은 복싱이라는 스포츠 자체를 응원한 것이다.

반대로 메이웨더는 오직 지지 않는 것을 목표로 자신의 스타일을 세공해왔다. 한계 너머의 동체시력과 순발력으로 펀치를 피하고, 짐승 같은 스피드로 짧은 유효타를 치고 빠지며, 적극적인 클린치로 싸움을 멈춘다. 링 밖에서는 늘 돈 자랑에 여념이 없는 철부지이기도 하다. 물론 메이웨더의 아웃복싱은 간단히 폄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스피드와 수비력은 충분히 감탄의 대상이 된다. 메이웨더가 비판받는 것은 그가 아웃복서라서가 아니라, 그가 복서이기 때문이다. 전설로 남을 수 있었던 이 경기에서, 그는 포인트만을 따기 위해 상대에게 가벼운 펀치를 ‘묻힌 후’ 빠른 발로 빠지거나 끝없는 클린치로 ‘주먹의 교환’이라는 복싱의 대전제를 무시했다.

다소 둔탁했지만 어쨌든 경기 내내 상대를 향해 돌진한 파퀴아오는 3:0 심판 전원 일치의 판정패를 당했다(118:112로 메이웨더의 승리를 채점한 심판은 혼자 농구를 본 것인가?). 공격적이었던 파퀴아오보다 메이웨더의 유효타가 더 많았다는 이유다. 이런 세기의 경기가 뒷걸음질치며 점수만 딴 선수의 승리로 판정된다면 우리가 사랑했던 복싱은 끝난 것이다.

많은 격투기에서는 소극적인 선수에게 페널티를 준다. 유도의 지도, 태권도의 경고, 레슬링의 파테르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승부를 가르는 결정적 요소가 된다. 축구의 오프사이드 룰이 축구라는 경기를 성립시키는 핵심 규칙이듯, 주먹을 교환하며 승부를 보려는 태도는 복싱을 복싱이게 하는 기본 로직이다. 그러나 현대 복싱은 메이웨더의 뒷걸음질을 제재할 룰이 없었고 더구나 메이웨더를 승자라고 판단했다. 메이웨더에게 진 것은 파퀴아오가 아니라, 복싱 그 자체다.

김준 사직아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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