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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미네이터가 있어 행복했다

투박한 질주가 선물한 쾌감
등록 2015-02-03 05:41 수정 2020-05-0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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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대의 로봇이 한국을 강타했다. 아이돌 출신 가수로 연기에 도전했으나 극악의 연기력으로 ‘로봇 연기’라는 조롱을 받았던 장수원은 을 패러디한 이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그토록 조롱받았던 그의 뻣뻣한 로봇 연기는 오직 을 위해 단련해온 것인 듯했고 사람들은 웃느라 넋이 나갔다.

아시안컵 축구대회 화제의 중심엔 차두리가 있었다. 어느덧 36살의 최고참이 된 그는 쿠웨이트전과 우즈베크전에서 70m의 치고 달리기로 후배의 골을 끌어냈다. 아시아인의 한계를 넘어선 강력한 육체적 능력과 스피드로 우당탕탕 질주하며 상대의 측면을 파괴한 차두리의 ‘로봇쇼’는 한국인들의 피를 끓게 했다. 30년 전의 차범근에게서 우리가 보았던 그 장면이 그대로 재연된 것이다. 장수원과 차두리. 이 2대의 로봇은 모두 1980년 7월에 ‘생산’된 기종이라는 묘한 공통점도 있다.

한국 축구사 최고의 장면이 될 뻔했던 단 하나의 순간을 뽑는다면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터진 차두리의 오버헤드슛이다. 종료 5분 전 설기현이 극적인 동점골을 기록한 한국은 끝장을 보려 했고, 후반 종료 직전 문전 혼전 상황에서 차두리가 발사한 회심의 오버헤드킥이 골키퍼의 정면으로 가면서 아쉽게 연장전으로 들어갔다. 물론 연장전에서 우리는 안정환의 골든골로 또 다른 드라마를 완성했지만, 만약 차두리의 오버헤드킥이 골로 연결됐다면, 연장전의 오심 논란과 월드컵 직후 안정환의 이탈리아 리그 퇴출 등은 없었을 것이고, 한국의 승리는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드라마가 될 뻔했다. 처음 대표팀에 발탁된 22살 청년이 월드컵 16강전에서 후반 종료 직전 오버헤드킥으로 역전골을 터뜨렸다는, 그가 다름 아닌 (직전 월드컵에서 중도 퇴출된 감독인) 차범근의 아들이라는, 그 눈앞에 다가왔던 ‘축구만화’는 단 1m의 차이로 한국 축구사를 비켜갔다. 감독 홍명보가 여론의 철퇴를 맞으며 퇴장한 뒤 열린 아시안컵에서 폭발한 차두리는, 2002 월드컵 이탈리아전의 후반전에 홍명보와 교체돼 투입된 선수이기도 했으니, 기이한 운명이다.

축구선수 차두리에게 아버지 차범근은 하늘이 내린 행운이자 평생의 족쇄였다. 차범근이라는 위대한 선수의 피를 물려받은 아들로서 차두리는 늘 관심과 비교의 대상이었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강인한 육체가 차두리 몫의 행운이라면, 그 대가로 평생의 비교 대상이 차범근이라는 사실은 차두리의 영원한 불운이었다.

물론 차두리가 대단한 테크니션은 아니다. 둔탁하고 투박하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늘 아버지와 비교해 차두리를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발재간으로 제쳐내는 것이 아니라 몸싸움으로 튕겨내며 전진하는 그의 플레이에는 이상한 로망이 있었고, 한국 축구는 그의 투박한 질주로 많은 선물을 받았다. 거칠지만 박력 있고 당당한 선수. 영원히 차범근이라는 안경을 쓰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묵묵히 감당해야 했던 선수. 훗날 2000년대의 한국 축구는 결국 박지성의 시대로 기록되겠지만, 그 속에 인간들의 편견에 맞서 싸운 차두리라는 매력적인 로봇이 달리고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메시의 유려함과 호날두의 화려함이 아니더라도, 차두리의 폭주가 있어 우리는 행복했다. 사직아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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