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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 오브 아시아’의 영광을!

껌팔이 소년에서 위대한 복서가 된 매니 파키아오
등록 2014-12-25 15:47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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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포츠 종목의 역사를 바꾼 단 한 명의 아시아인을 뽑는다면 필리핀의 복싱 영웅 매니 파키아오다. 그는 플라이급에서 시작해 웰터급까지 세계 복싱 역사상 최초로 8체급을 석권한,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전설이다(프로복싱은 총 17체급). 언젠가 필리핀으로 출장을 갔을 때, “파키아오의 팬이다”라고 건넨 인삿말은 현지인과의 모든 친분을 완성시켰다. 파키아오의 체육관은 필리핀 반군의 주둔지로 알려진 제너럴산토스에 있는데, 현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파키아오의 경기가 열리면 반군들도 모두 TV 앞에 모여들어 하나된 필리핀을 이룬다고 한다.

2008년, 미국의 ‘골든 보이’ 오스카 델라 호야를 일방적으로 두들기며 8회 TKO승을 거두면서 파키아오의 현재진행형 전설은 정점에 달했다. 호야보다 10cm 작고 5.7kg 가볍던 필리핀인이 자국의 영웅을 무참하게 ‘발라버리는’ 것을 본 미국인들은 경악했고, 이 필리핀의 챔피언을 향해 엄지손가락 2개를 들어올렸다.

지난 11월23일, 37살의 파키아오는 20승 무패의 30살 복서 알지에리를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으로 물리쳤다. 고전이 예상된다던 예상을 비웃듯 강력한 레프트와 인간계 너머의 스피드, 오직 파키아오만이 뻗을 수 있는 예술적 각도의(이른바 ‘파키아오 앵글’) 다이내믹한 펀치들로 6차례 다운을 빼앗은 끝에 거둔 완벽한 승리였다. 가난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길거리에서 껌과 초콜릿을 팔아야 했던 소년은 지금 복싱의 역사를 바꾼 슈퍼스타가 되었고, 태풍으로 고통받는 자국민들을 위해 대전료 191억원 전액을 기부하는 구국의 영웅이 되었다.

현재 파키아오의 전적은 57승(38KO) 2무 5패다. 실신 KO패가 포함된 5번의 패배로 다소 지저분해진 전적이지만, 이것은 승부를 두려워하지 않고 20kg의 체중 사이에 걸친 8체급을 차례로 석권해온 파이터로서의 위대한 역사를 역설한다. 현역 최고의 대전료를 받는 미국의 메이웨더 주니어는 47승 무패라는 깔끔한 전적을 자랑하는 위대한 복서이지만, 티끌 하나 없는 그의 전적은 어딘지 모르게 관리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메이웨더는 언제나 파키아오와의 대결을 회피해왔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전세계 복싱팬들이 염원해온 슈퍼 매치가 마침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내년 5월 여러 이유로 무산돼오던 파키아오와 메이웨더의 경기가 확정적이다. 2002년 월드컵 8강 스페인전, 한국의 붉은 악마가 선택한 카드 섹션 문구는 ‘프라이드 오브 아시아’(Pride of Asia)였다. 그때의 한국 축구팀은 정말로 아시아인의 응원을 등에 업고 경기에 나섰다. 이제 ‘프라이드 오브 아시아’라는 영광을, 필리핀의 가난한 껌팔이 소년에서 위대한 복서로 성장한 아시아의 왼손, 매니 파키아오에게 바쳐야 할 때다.

김준 사직아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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