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 최고의 화두는 누가 뭐래도 드라마 이었다. 가진 것도 없고 이렇다 할 ‘스펙’도 없는 장그래가 회사라는 정글에서 견뎌내야 했던 횡포와 그 속에서 펼친 악전고투는 한국 사회 곳곳에 도사린 뇌관을 건드렸고 4500만 ‘장그래’들의 눈물과 환호를 소환했다. 좁쌀 같은 고용인과 태산 같은 피고용인으로 이루어진 사회, 한 줌의 갑(甲)들과 해운대 모래알 같은 을(乙)들로 이루어진 세상은, 급기야 항공사 부사장이라는 슈퍼 갑(甲)의 정신 나간 ‘갑질’에 분노를 폭발시키며 재벌가 딸의 구속 수사까지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을(乙)들의 봉기다.
이와 같은 을들의 대동단결에서 소외된 자들이 있다. 올겨울 프로야구 자유계약(FA) 시장은 나날이 기록을 경신하며 출혈경쟁으로 막을 내렸다. 총액 84억원으로 역대 FA 최고액 기록을 경신한 장원준과 함께 올겨울 팬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선수는 이재영(사진), 나주환(이상 SK), 이성열(넥센), 차일목(KIA)이었다. 이들은 모두 소속팀과의 우선협상을 거부하고 시장으로 나갔지만 다른 팀의 선택을 받지 못했고, (‘괘씸죄’가 반영돼) 대폭 삭감된 금액으로 원소속팀과 계약을 마무리지었다. 동료 선수들이 수십억원의 돈잔치를 벌이는 동안, 시장의 외면과 소속팀의 냉대를 감수해야 했던 이들의 겨울은 차갑고 외로웠다.
그러나 이들을 더욱 외롭게 만든 것은 팬들의 조롱이었다. 원소속팀과의 계약을 거부하고 시장으로 나간, 슈퍼스타가 아닌 이들에게 일부 야구팬은 “분수를 모른다” “돈에 환장했다”라는 악성 댓글들로 가슴을 찢어댔다. 프로야구 선수에게 FA 계약이란 자신의 생계와 노후를 보장받을 거의 유일한 기회이며 선수생활 중 ‘갑’의 위치에 서는 단 한 번의 기회다. 소속팀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시장에 나가는 선수들은 대부분 “나의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서”라고 에둘러 표현하지만 그건 그냥 “더 많은 돈을 주는 곳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과연 나쁜 것인가? FA 자격을 취득한 선수들은 향후 인생을 결정지을 이 계약에 ‘생활인’으로서 인생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야구선수 이전에, 더 좋은 조건을 찾아보고 싶은 한 가정의 가장들에게, 한 명의 생활인에게, 당신은 왜 “분수를 알아라”는 갑질을 하고 있는가. 시장에서 외면받고 원소속팀과 헐값에 계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던 선수들의 상처에 당신은 왜 “ㅋㅋㅋㅋ”라는 유치한 조롱을 택하는가.
왜 우리는 ‘팬’이라는 가면으로 운동선수의 인생을 조롱하는 것에 죄의식이 없는가. 인생을 걸고 계약을 기다리는 선수에게 “분수를 알아야지”라는 무시무시한 폭언을 아무렇지 않게 난사하는 당신은, 과연 에 열광할 자격이 있을까? 드라마 밖에서 ‘임시완’이 아닌 장그래를, 당신은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는가?
김준 사직아재·칼럼니스트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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