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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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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2일의 꿈은 물거품이 됐지만

대역전극에 지워진 롯데 심수창의 호투
등록 2015-04-29 18:54 수정 2020-05-03 04:28

모두들 “야구는 인생과 같다”고 얘기하고, 모두가 그에 대한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지난 4월10일 부산 사직야구장. 롯데 자이언츠와 한화 이글스가 펼친 경기에서 사람들은 5시간으로 요약된 인생을 ‘직관’할 수 있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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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회까지 8:2로 앞서며 손쉽게 승리할 것 같았던 롯데는 9회 불펜이 무너지며 8:8의 비극적인 동점을 허용했다.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한 경기를 쫓아간 한화는 연장 11회초 김태균의 홈런으로 기어이 9:8 역전에 성공했다. 9회부터 등판한 한화의 권혁은 이 경기에 모든 것을 건 듯 완벽하게 롯데의 공격을 차단하며 송은범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11회말 롯데의 마지막 공격 2아웃 주자 1루. 모두가 한화의 대역전극으로 끝나리라 생각한 이때, 롯데의 장성우는 송은범의 초구를 밀어쳐 2점 끝내기 재역전 홈런을 터뜨리며 이 야구만화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선수들은 최후까지 하얗게 타올랐고, 주인공 장성우는 그날 밤 부산의 대통령이 되었으며, 51개 역투를 보인 권혁은 단 1개의 실투로 5시간의 추격을 날려버린 송은범과 함께 주저앉아버렸다. 흔한 덕담처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해봐도 인생은 쉽게 응답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마지막 드라마 때문에 지워져버린 사내가 있었다. 이날 롯데의 선발은 심수창이었다. 이 경기까지 심수창은 2011년 8월27일 이후 1322일 동안 선발승을 기록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가대표를 거친 LG의 주전 선발투수는 넥센을 거쳐 롯데로 이적하는 2군을 전전했고, 35살의 잊혀진 투수에겐 더 이상 설 곳이 없어 보였다. 야구선수라기엔 지나치게 말끔하고 잘생긴 외모는 늘 불필요한 편견을 심수창에게 덤으로 씌워주었다.

그러나 돌아온 심수창은 달랐다. 투구폼을 수정해 놀랍게도 35살에 구속을 향상시켰고, 솜털 같던 공은 돌처럼 단단하게 뿌려졌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심수창은 5이닝 4피안타 무자책점의 역투를 선보이며 1322일 만에 선발승의 요건을 갖춘 채 마운드를 넘겼다. 경기 후반에 펼쳐진 양 팀의 드라마 탓에 지워져버렸지만 이날 잊혀진 투수 심수창이 평생의 투구폼을 수정하며 뿌려댄 직구는 감동적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심수창이 넥센 소속이던 2011년 8월9일, 투수 18연패라는 프로야구사의 비극적인 기록을 끊어낸 상대팀이 바로 지금의 소속팀 롯데라는 사실이다. 더욱 아이러니하게도, 이날 9회에 올라와 난타를 당하며 심수창의 선발승을 날려버린 롯데 구원투수 이정민은 2012년 8월29일, 무려 3254일 만에 선발승을 거둔 바 있는 37살의 노장이다. 누구보다 심수창의 간절함과 절박함을 알고 있었을 이정민은 자신이 날려버린 심수창의 1322일을 생각하며 팀의 승리와 상관없이 미안함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 절치부심 끝에 임무를 완수하고 결과를 기다렸건만, 동병상련인 동료의 실수로 나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바람에 하소연할 곳도 없어 혼자 슬픔을 삼켜야 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허다한 순간 중의 하나다.

그리고 심수창은 이어진 2경기에서도 호투했으나 구원투수진의 붕괴로 똑같은 참사를 겪어야 했다. 이 정도 비극은 차라리 희극이다.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은 야구 위를 흐른다.

김준 사직아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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