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월드컵의 한국 개최가 확정된 1990년대 중반, PC통신 스포츠 게시판에 괴소문이 퍼졌다. 한국은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위해 오래전에 천재 축구소년을 유럽으로 보내 키우고 있으며, 2002년에 20대 초반이 되는 이 소년이 한국 축구의 운명을 바꿀 비밀병기가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눈덩이처럼 굴러간 소문은 급기야 소년의 이름이 ‘김산’으로 확인됐다는 정설로 확대재생산됐다. 2002년 우리는 그런 소년은 없었다는 것을 확인했고, 월드컵 4강으로 한국 축구의 역사를 바꾼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던 선수들로 구성된 하나의 단단한 팀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소문에 가슴 설레었던 것은 실소를 금치 못할 촌극이었지만, 이렇다 할 승리의 역사를 가져보지 못한 한국 축구팬들의 염원이 저런 가상의 메시아를 호출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울리 슈틸리케가 이끄는 대표팀의 중동 원정이 끝났다. 한 수 아래의 요르단에 이기고 노숙 축구의 이란에 졌다. 출범 이후 치른 4차례 평가전에서 2승2패를 기록하는 동안 슈틸리케는 매 경기 출전 선수를 바꿔가며 가용 가능한 자원들을 실험했다. 현재까지는 다양한 변화 속에서도 비극으로 끝난 브라질 월드컵에 비해 안정적 경기력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 대표팀은 안정돼가지만 한국 언론의 경박함엔 변함이 없다. 인터넷에는 경기가 끝난 지 1분 만에 (수십만의 ‘클릭질’이 보장된) 박주영이 ‘따봉’을 몇 개 했는지에 대한 기사가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올라온다. 경기에 대한 선무당 기자들의 인상비평이 이어지고 빠져야 할 선수와 들어가야 할 선수에 대한 훈수도 잊지 않는다. 홍명보를 사지절단하고 박주영을 매국노로 만들어버린 언론은 여전히 20년 전처럼 ‘김산’이라는 가상의 메시아를 기다리며 소설을 쓰는 중이다.
주말마다 유럽 축구를 생중계로 보는 시대에, 팬들은 축구에서 팀과 전술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두말할 것 없이 축구는 팀플레이가 가장 중요한 종목이다. 인간계 너머의 존재가 되어버린 메시와 호날두도, 자국에 월드컵 우승을 안기진 못했다. 그 어떤 신도 11명의 인간으로 뭉쳐진 팀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축구팬들보다 더 축구를 보지 않는 듯한 기자들만 오직 전술이 아니라 선수가 문제라 생각한다.
11명의 조합으로 만들 수 있는 포지션의 수학적 경우의 수는 39,916,800개다. 이 천문학적 숫자에서 최적의 조합을 찾아 단 하나의 패를 선택하는 것이 감독의 일이다. 슈틸리케 감독에게 바라오니, 오직 당신이 본 것만을 기준으로 최적의 조합을 찾으시라. 히딩크처럼 한국 언론을 철저히 무시하시라. “여론은 존중하는 것만큼 경멸해야 한다.” 레닌의 말이다.
김준 사직아재·칼럼니스트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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