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의 마지막 밤,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앞 거리에서 열린 김주익·곽재규 열사 9주기 추모제. 공장 안에서 열리지 못한 이날 행사는 노동자의 쓸쓸한 현실을 보여주는 듯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제공
제가 중학교 때 아버지는 왼쪽 눈의 시력을 잃으셨습니다. 독한 화학공장에서 20년 넘게 근무하시며 생긴 후유증으로 발병한 백내장 탓입니다. 아버지는 40대 중반의 나이에 직장에서 나오셔야 했습니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40대 중반의 남자를 고용해주는 직장은 없었습니다. 자식들은 한창 커가고 있는데 세상으로부터 모든 기회를 박탈당해버린 남자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울음을 삭이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때부터 저에게도 가끔 왼쪽 눈을 가리고 걸어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단지 한쪽 눈을 가렸을 뿐인데, 시야는 4분의 1로 좁아졌고 몸의 균형을 잡기도 어려웠습니다. 한쪽 눈을 감으면 양손의 집게손가락을 맞붙여보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텅 빈 집에서 혼자 잔인한 절망과 싸워온 아버지는 인고의 세월을 지나 지금은 두 개의 눈보다 더욱 많은 세상을 볼 줄 아는 마음 좋은 할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지난 11월4일, 강원 FC의 스트라이커 김은중은 프로축구 400경기 출전이라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국가대표 스트라이커 출신으로 오랫동안 K리그를 지켜낸 레전드입니다. 그의 400경기 출전이 감동적인 이유는 김은중이 보이지 않는 왼쪽 눈을 이겨내고 10년을 달려낸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왼쪽 눈의 시력을 프로 입단시 완전히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 대신 발로 보았고, 보이지 않으면 달렸습니다. 2002 월드컵 4강 신화 속에는, 실명된 왼쪽 눈을 숨기고 오른쪽 눈으로만 경기장 전체를 바라보며 경기를 조율해낸 유상철의 그야말로 ‘신화’ 같은 비밀이 숨어 있었습니다. 히딩크마저도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하니, 혼자서 견뎌내야 했을 유상철의 잔인한 비밀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 외에도 실명된 축구 선수는 많습니다. 1980년대, 한국 축구 부동의 스트라이커 이태호는 경기 중 상대 선수의 발에 얼굴을 맞아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습니다. 수원 삼성의 수비수 곽희주는 어린 시절부터 왼쪽 눈이 실명 상태였고 오른쪽 눈의 시력도 좋지 않지만 리그를 대표하는 수비수였습니다. ‘투혼의 파이터’라는 별명에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축구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가 택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생존 방법이 녹아 있습니다. 지금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인 곽태휘는 고등학교 시절 망막이 찢어지는 사고로 왼쪽 눈을 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표팀에서 가장 높이 뛰어올라 가장 파괴적인 헤딩을 성공시키는 선수입니다.
메시, 호날두 같은 ‘신의 영역’에 있는 선수들의 경기를 생방송으로 볼 수 있는 건 우리 세대의 행운입니다. 그러나 앞의 선수들처럼, 축구 선수로서 최악의 핸디캡을 이겨내며 차고 달리고 뛰어오르고 몸을 던지며 벌이는 이 외눈박이 선수들이 펼쳐온 보이지 않는 눈과의 승부는, 메시나 호날두가 줄 수 없는 ‘인간계’만의 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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