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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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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을 기다린 1루수

롯데 자이언츠 박종윤의 플레이볼
등록 2012-04-28 14:36 수정 2020-05-03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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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롯데 자이언츠의 1루수 이대호가 일본행을 발표했습니다. 롯데 팬의 가슴에 셀 수 없는 드라마를 선물해준 조선의 4번 타자였습니다. 팬들은 아쉬웠지만 영웅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해주었습니다. 팬들과 이대호가 뜨거운 석별의 정을 나눌 때, 10년을 기다린 인생의 승부를 준비하던 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롯데 자이언츠의 1루수 박종윤. 이대호의 입단 동기인 11년차 선수입니다. 국내(아마 세계) 최정상급의 1루 수비를 자랑하며, 국내(아마 세계)에서 낮은 공을 가장 잘 때리는 타자입니다. 원바운드에 가까운 공을 골프 스윙처럼 퍼올리며 안타를 만들어내니 박종윤의 타석 때 팬들은 “발톱을 파고드는 한가운데 실투” “발목으로 날아드는 높은 공”이라는 농담을 주고받습니다. 항상 홍조를 띠고 왠지 어수룩한 표정을 지으며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낮은 공을 퍼올리는 데 집착하니 ‘팡야’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고, 홈런을 치면 딸의 분윳값을 벌었다는 뜻에서 ‘분유포’라 불리기도 합니다. 선수의 별명이라기엔 참 멋이 없습니다.

지난해 133게임 중 111게임에 출장했으니 거의 주전급이라 보일 수도 있겠지만 111게임 동안의 총 타석 수가 고작 158타석입니다. 거의 한 게임에 한 번 정도 대타로만 나온 거지요. 지난 10년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의 경쟁자는 이대호였기 때문입니다. 이대호를 꺾어야 주전이 되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불공정한 경쟁을 펼쳐온 선수가 박종윤입니다.

짧은 영광도 있었습니다. 2010년 박종윤은 동군의 1루수로 올스타전에 출전했습니다. 최고의 스타 선수들이 모여든 축제의 장에서 박종윤은 내내 어색함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동료 스타 선수들과 더그아웃에서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했습니다. 성적과 실력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롯데 팬들의 열성적인 투표 때문에 올스타가 되었다는 자괴감이 얼굴에 묻어 있었습니다. 항상 이대호라는 거물 뒤에서 하루에 한 번의 기회만을 위해 살아야 하는 대타 인생에 익숙해진 그에게 올스타라는 훈장은 좀 민망했던 모양입니다.

지난 10년간 박종윤은 최고 스타가 된 동기의 뒤에서, 경기 내내 연습 스윙을 하며 단 한 번 주어질 기회만 기다리거나, 승부가 기울어진 시합의 후반에 출전해, 영웅이 된 동기의 체력을 비축해주는 역할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야구장이든 회사든,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이대호가 아닌 박종윤의 인생을 살고 있겠지요. 올해 박종윤이 야구를 잘해야 하는 이유는 많지만 그 무엇보다 세상의 모든 ‘박종윤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길 빕니다.

지난 몇 년간 박종윤의 인터뷰 대부분에는 “언젠가 기회가 오리라 믿는다”는 말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대호의 일본 진출로 거짓말처럼 10년 만에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4월18일 현재, 개막 이후 9게임 연속 안타를 쳐낸 박종윤의 타율은 0.441입니다. 타격 2위, 안타 2위, 출루율 2위입니다. 박종윤의 플레이볼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직아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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