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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보다 거친 표현, 더는 남쪽에 기댈 필요 없다는 김정은의 자신감

‘적대적 두 국가’ 재확인한 북 당대회 보도문 뜯어보니… 한국엔 날 세우고 미국엔 여지를
등록 2026-02-26 21:56 수정 2026-02-27 11:37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겸 노동당 총비서가 2026년 2월23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9기 제1차 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조선중앙텔레비전 갈무리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겸 노동당 총비서가 2026년 2월23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9기 제1차 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조선중앙텔레비전 갈무리 연합뉴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최대 정치행사인 조선노동당 제9차 당대회가 2026년 2월19~25일 평양 모란봉 구역 4·25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대회 폐막에 맞춰 북쪽이 대내매체인 노동신문과 대외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공개한 ‘당대회 보도문’을 보면, 남과 북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두 국가다. 이른바 ‘남북관계’는 옛말이 됐다. 남쪽이 추구하는 ‘교류와 협력’을 북은 ‘체제 위협’으로 인식한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뒤 집권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통치체제’ 정비에 공을 들였다. 중국 공산당은 중요한 ‘역할 모델'이었다. 지역의 기층 당 조직에서 출발해 시·군당과 각급 성 당위원회를 거쳐 당대회(전국대표대회)에 참가할 대표단을 선출하는 방식이 중국식 ‘민주집중제’의 뼈대다. 김 위원장이 조부인 김일성 주석과 부친인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대엔 정기적으로 열지 않았던 당대회를 중국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5년 단위로 정례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를 통해 조선노동당 당대회는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와 마찬가지로 지난 5년에 대한 평가, 향후 5년간 국정과제와 대외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북한의 최고의사결정 기구로 자리매김했다.

당대회를 앞두고 관심의 초점은 대남·대미 관계에 대해 북이 어떤 입장을 내놓느냐에 쏠렸다. 당대회 기간에 북쪽은 이와 관련한 일체의 반응도 내놓지 않았다. 폐막 다음날인 2월26일 오전 공개된 당대회 보도문엔 ‘대한민국’과 ‘한국’이 각각 2차례와 23차례 등장했다. 남북관계를 뜻하는 ‘조한관계’도 4차례 언급됐다. ‘미국’과 ‘조미관계’는 각각 16차례와 1차례 나왔다. 하나씩 따져보자.

 

북 “한국, 동족 범주서 영원히 배제”

 

먼저 보도문은 “사실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은 근 80년 동안 서로 별개의 국가로서 존재하여왔으며 유엔에도 하나의 의석이 아니라 두 개의 국가로 가입했다”며 “가장 적대적인 실체인 대한민국과 상론할 일이 전혀 없으며 한국을 동족이라는 범주에서 영원히 배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김 위원장이 당대회 폐막에 앞서 “우리 당이 공화국 창건 이후 근 80년에 걸쳐 조선반도에 존재하여온 비정상적인 관계에 역사적 종지부를 찍고, 한국과의 관계를 가장 적대적인 국가 대 국가 간 관계로 정립하는 최종적인 중대 결단을 내린 데 대하여 지적하시고, 우리 당과 정부의 불변한 원칙적 입장을 천명”했다고 덧붙였다. 김일성·김정일 시대의 대남정책 자체를 부정한 셈이다.

북은 ‘적대성’을 강화할 것임도 분명히 했다. 보도문은 “한국과 잇닿아 있는 남부 국경선을 가급적 빠른 기간 내에 요새화하고 경계체계와 화력체계들을 보강할 데 대한 당의 군사전략적 방침을 책임적으로 관철하여야 한다”며 “앞으로의 5년 기간 한국 지역을 억제하기 위한 주력 타격수단들인 600㎜ 방사포와 신형 240㎜ 방사포 체계들, 작전 전술미사일 종합체들을 연차별로 증강배치하여 전쟁 억제력의 핵심부문을 더욱 강화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북쪽은 윤석열 정권 시절이던 2024년 10월 군사분계선(MDL) 북쪽 경의선·동해선 연결 도로와 철도를 폭파하고 요새화 공사에 들어간 바 있다. 북쪽이 막히면 유라시아로 향하는 육로가 사라진다. 한반도의 남쪽은 섬이 되고 만다. 보도문은 이렇게 못박았다.

2026년 2월25일 밤 북한 수도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제9차 당대회 기념 열병식이 열리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2026년 2월25일 밤 북한 수도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제9차 당대회 기념 열병식이 열리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문화·변화·자유민주주의에 위협적 인식

 

“애초에 역대 한국 집권세력들은 우리와의 진정한 화해와 단합을 바라지 않았으며 음흉하게도 화해와 협력의 기회를 통해 우리 내부에 저들의 문화를 유포시키면서 그를 통한 그 누구의 변화를 꾀하고 나아가 우리 체제의 붕괴를 기도해왔다. 한국의 현 집권 정권이 겉으로 표방하는 유화적인 태도는 서투른 기만극이고 졸작이다. 궁극적으로 전 조선반도를 ‘자유민주주의’의 자본주의 반동체제로 변신시킬 야망을 품고 겉으로는 기만적인 ‘화해’와 ‘평화’를 제창하면서, ‘조선반도 비핵화’의 간판 밑에 우리의 무장해제를 획책하는 위해로운 존재를, 같은 ‘민족’이라는 타성에 포로되어 절대 불가능한 화해와 ‘통일’을 이유로 계속 상대하는 것은 더이상 존속시키지 말아야 할 착오적인 관행이다.”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북쪽이 ‘자본주의 반동체제’보다 ‘문화’ ‘변화’ ‘자유민주주의’ 따위를 더욱 위협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과거처럼 ‘민족’ ‘화해’ ‘통일’을 말하는 건 그야말로 ‘착오’일 뿐이다. 1970년대 서독과의 체제 경쟁에서 밀린 동독도 ‘두 국가’를 넘어 ‘두 민족’ 주장까지 내달린 바 있다. 보도문은 “우리는 과거 시대의 낡은 관념과 유물잔재를 깨끗이 청산하고 우리 인민들의 정치사상 생활과 정신문화 영역에 한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으로 고착시키기 위한 국가적인 대책들을 전격적으로 했다. 비현실적인 대화협상, 교류협력을 위해 존재하던 기구와 단체들을 정리하고 관련 법규와 합의서, 시행 규정들을 폐지한 데 이어 남부 국경지역의 모든 연계통로와 공간을 물리적으로 완전히 차단하기 위한 법률적, 행정적 조치들을 연이어 강구하였으며 군사적으로 요새화하는 조치들을 결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 적대 철회하면 좋게 지내지 못할 이유 없어”

 

미국에 대해선 제8차 당대회(2021년 1월) 때와 마찬가지로 ‘강 대 강, 선 대 선’ 원칙을 재천명했다. 보도문은 “우리에 대한 미국의 태생적인 적대적 시각과 강권으로 체질화된 불량배적 성질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며 “우리는 현재처럼 앞으로도 계속 미국과의 대결에 만반으로 준비하며 최강경 자세를 변함없는 대미정책 기조로 확고히 견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이미 천명했듯이 만일 미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 명기된 우리 국가의 현 지위(핵보유국)를 존중하며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철회한다면 우리도 미국과 좋게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조미관계의 전망성은 미국 쪽의 태도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썼다. 대화의 문은 열어놨지만, 그 문으로 통과해야 할 주체는 북이 아니라 미국이란 뜻이다.

“북쪽의 표현이 예상보다 훨씬 거칠다. 더는 남쪽에 기댈 필요가 없다는 모종의 ‘자신감’이 느껴진다. 1990년대 중반 북쪽의 경제위기와 함께 본격화한 ‘남북관계의 시대’가 저문 느낌이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은 “대화 없는 군사적 긴장 완화를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고 짚었다. 그는 “접경지역에서 군사적 긴장을 어떻게 낮출 것이냐가 중요하다. 대화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선조치하면 북쪽이 호응한다.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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