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안이라는 쇼트트랙 선수가 있습니다. 세계선수권대회 5연패를 달성한 얼음 위의 신입니다. 뒤처진 선수들이 필사적으로 양손을 흔들며 힘을 내보지만 뒷짐을 지고 유유히 질주하는 그 선수는 추격을 불허했습니다. 온몸이 튕겨져나갈 듯한 원심력을 무시하고 트랙을 직선으로 자르며 질주하는 그 선수는 얼음 위의 리오넬 메시였고, 우사인 볼트였으며, 마이클 조던이었습니다. 0.01초의 싸움인 쇼트트랙에서 동료가 넘어져 한 바퀴 차이가 난 계주 시합을 마지막 한 바퀴에서 뒤집어버리는 기적의 스케이터였습니다. 선수가 존경하는 선수, 그가 바로 현 러시아 국가대표 빅토르 안이며, 한국명 안현수라 불리던 선수입니다.
지난해 12월, 전설의 스케이터 안현수가 돌연 러시아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그러고는 러시아 국가대표가 되어 계주 시합에서 한국팀과 맞붙었습니다. 몇몇 종목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외국 선수나 타국으로 귀화한 한국 선수는 종종 있었지만, 안현수와 같이 비교를 불허하는 레전드급 스포츠 선수가 타국의 선수가 되어 한국팀과 경쟁하는 것은 한국인에겐 몹시 생경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은 축구로 말하자면 메시가 아르헨티나의 국적을 버리는 일입니다.
세계를 정복한 몇 안 되는 한국인 중 하나였지만, 한국은 그에게 상처투성이의 땅이었습니다. 병역 문제 해결을 위해 세계대회 우승을 양보해주길 강요했던 선배의 구타, 출신학교에 따른 코치들의 편가르기, 타국 선수가 아니라 자신을 마크하던 동료들, 그의 부상 시기에 맞춰 개최된 국가대표 선발전. 계속되는 진실게임과 막장으로 치닫는 은폐와 폭로의 꼬리 물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올림픽에 출전하고 싶었던 이 전설에게 모국의 얼음은 비정했습니다.
팬들의 반응은 다양합니다. 귀가 얇고 입이 가벼운 자들은 ‘안현수 매국노’를 포털 사이트의 연관검색어로 만들어버렸지만, 그가 한국에서 받은 상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의 선택을 지지했습니다. 여전히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지연과 학연과 인맥에 치이며, 노력과 무관하게 상처받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포기하면서까지 기회를 찾아 떠난 안현수의 슬픔을 이해합니다. 어떤 한국인도 안현수를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스포츠에서 얻는 감동의 원인은 국적이 아니라 사람 때문입니다.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고 흘린 땀만큼 보상이 주어지는 승부의 세계. 안현수든 빅토르 안이든, 둥근 트랙을 직선으로 쪼개며 뒷짐을 지고 잉어처럼 유유히 얼음 위를 유영하던 그 스케이터의 초능력은 여전히 한국인의 자랑입니다.
한 인간의 꿈보다 더 위대한 국적은 없습니다. 스케이터의 조국은 빙상입니다. 멀리서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힘내세요, 위대한 한국인 빅토르 안.
사직아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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