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독일 겔젠키르헨에서 펼쳐진 월드컵 C조 아르헨티나-세르비아몬테네그로 경기. 전반 31분에 터진 아르헨티나의 골에 전세계 축구팬들의 입은 동시에 크게 벌어졌다. 아르헨티나 진영에서 전개된 공격은 무려 24번의 패스를 거쳐 미드필더 에스테반 캄비아소의 깨끗한 왼발 슛으로 마무리됐다. 공격 전개에 군더더기는 없었다. 마치 액션영화에서 배우 한명 한명의 동선을 미리 짜듯이 정교하게 연출된 작품 같았다. 최근 인천 유나이티드의 감독직을 사임한 일리야 페트코비치가 이끌던 세르비아몬테네그로 국가대표팀은 유럽 조별 예선에서 스페인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복병이었다. 이를 비웃듯, 아르헨티나는 6-0의 대승을 기록했다. 주최국인 독일 월드컵조직위원회는 캄비아소의 골을 2006년 월드컵 최고의 골로 선정했다. 이 골은 춤추는 듯한 리듬감과 간결한 패스, 탄탄한 팀워크로 ‘아르헨티나표 축구’가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백인만의 전유물로 출발한 아르헨티나 축구아르헨티나에 축구가 이식된 것은 지난 19세기 말이다. 1816년 스페인에서 독립한 아르헨티나는 비옥한 토지에서 나오는 곡물과 육류로 유럽 시장을 장악했다. 풍부한 생산력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미의 파리’로 떠올랐다. ‘아르헨티나 드림’을 찾아 유럽의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됐다. 1880년부터 1904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12년 동안 집권한 훌리오 로카 대통령은 교육받지 못한 노동자는 아르헨티나에 살 필요가 없다며 원주민과 흑인 말살 정책을 폈다.
흑인과 원주민은 정부의 탄압으로 극심한 빈곤 속에 죽어가거나 가까운 우루과이나 브라질로 이주했다. 아르헨티나에서 흑인을 좀처럼 보기 힘든 이유다. 유럽의 기술을 익히고 근대 교육을 받은 유럽인들은 낯선 땅에서도 쉽게 자립했고 소득을 올렸다. 축구는 이들 유럽 이민자와 함께 대서양을 건너왔다.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누리집을 보면, 아르헨티나 최초의 축구 경기는 1867년 6월20일 영국 이민자인 토머스와 제임스 호그 형제의 주도 아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크리켓 클럽에서 열렸다. 이렇게 싹튼 축구는 아르헨티나에서 중류층 이상 백인의 배타적인 스포츠로 자리잡았다.
아르헨티나 축구의 특징은 이웃한 브라질이나 멕시코와도 종종 비교됐다. 멕시코의 저명한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멕시코는 아즈텍족에서 내려왔지만 아르헨티나인들은 배에서 내려왔다”고 말했다. 이런 인종적 배경 탓일까. 멕시코 역시 유럽 문화와 함께 축구가 소개됐지만, 중류 이상 계층이나 도시에 한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도시 주변 마을에 사는 원주민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남미 지역 전문가인 이성형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아르헨티나 축구가 도시에 모인 이민자들에게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는 스펙터클이었다면, 멕시코 축구는 과거와 현재, 다양한 문화가 화해하고 공존하는 의례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브라질에서 축구가 뿌리내리는 방식도 조금은 달랐다. 초기에는 브라질 축구도 아르헨티나처럼 엘리트 스포츠로 한정됐지만, 곧 인구의 다수인 흑인과 흑·백 혼혈 물라토가 일하던 공장지대로 급속하게 퍼졌다. 리우데자네이로나 상파울루의 빈민가에서 축구는 대중적인 놀이로 빠르게 자리잡았다.
군부에 의한, 군부를 위한 1978년 월드컵
1920년대 들어 아르헨티나에서 축구 문화도 변화를 거친다. 하류층 노동자들이 ‘축구의 맛’을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라이벌 축구팀인 보카 주니어스와 리베르 플라테가 아르헨티나 축구의 계급적 성격을 드러낸 것도 20세기 초반이었다. 두 팀 모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탈리아 하층 이민자 거주 지역에 뿌리를 뒀지만, 리베르 플라테가 1938년 도시의 부유한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전투적 경쟁관계가 생겨났다. 하류층은 보카 주니어스를, 상류층은 리베르 플라테를 응원했다. 1968년 치러진 더비 경기에서는 양 팀의 팬 사이에서 생긴 충돌로 스탠드가 무너지면서 74명이 죽고 150여 명이 다쳤다.
아르헨티나 축구에는 군사 정부도 더러운 손때를 묻혔다. 빈민층에게 우호적 정책을 펴서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은 후안 페론 대통령이 임기를 남긴 채 1974년 사망했다. 그의 세 번째 부인이자 부통령이던 이사벨 페론이 세계 최초로 여성 대통령이 됐다. 연약한 민주주의의 싹을 다시 짓밟은 쪽은 군부였다. 호르헤 비델라 육군총사령관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자신이 직접 권좌에 올랐다. 전국에서 살육과 폭력, 고문이 횡행했다.
정통성이 부족한 정권에 필요한 것은 국민을 열광시킬 대규모 이벤트였다. 마침 아르헨티나에서 예정된 월드컵은 군부에는 ‘호재’ 정도가 아니라 ‘횡재’로 보였다. 당시 군부에 저항하던 게릴라 조직인 ‘몬토네로스’도 감히 월드컵 보이콧을 선언하지는 못했다. 타협으로 나온 구호가 “아르헨티나 우승, 비델라 총살”이었다. 오히려 축구 선수들이 더 과격했다. 독일의 베켄바워, 파울 프라이트너와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 등이 아르헨티나의 인권 탄압에 항의하며 경기 불참을 선언했다.
예상대로 1978년 월드컵은 부정부패와 승부 조작으로 얼룩진 대회였다. 아르헨티나와 맞붙은 헝가리는 2명이나 퇴장을 당했다. 당시 세계 언론들은 아르헨티나 정부가 심판을 매수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페루와의 경기도 석연찮았다. 조별 리그를 통과하기 위해 큰 점수 차의 승리가 필요했던 아르헨티나는 이미 조 탈락이 확정된 페루를 6-0으로 대파했다. 런던의 한 신문은 아르헨티나가 페루에 3만5천t의 곡물을 무상 원조하고 5천만달러의 차관을 보장하는 대가로 승리를 샀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우격다짐으로 결승까지 진출한 아르헨티나팀은 결국 요한 크루이프가 빠진 네덜란드를 1-0으로 이기고 첫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당시 시상대에 오른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감독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감독은 군부 수장과의 악수를 거부해서 파장을 낳기도 했다. 를 쓴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은 “아르헨티나 우승이 독재정권을 위한 ‘선물’만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1982년 군부독재는 붕괴하고 민주정부가 다시 들어섰다.
마라도나에 의한, 그를 위한 1986년 월드컵
1980년대 들어 월드컵 무대에 등장한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 축구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특히 1986년 아르헨티나 축구팀의 유일한 전술이 ‘마라도나에게 패스하라’였다는 것은 농담만은 아니었다. 당시 아르헨티나와 유럽 국가가 벌인 대결은 남미의 창의적인 축구와 유럽식의 기계적이고 짜임새 있는 축구 사이의 대결로 인식됐다. 여기서 서독을 비롯해 잉글랜드, 벨기에 등 유럽권 국가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구겨졌다. 마라도나 때문이었다. 그의 마술은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60m를 달리면서 4명의 수비수와 문지기까지 농락하면서 넣은 골이 절정이었다.
여기에 맞선 유럽의 전술적 선택은 한 발짝 더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문전을 걸어잠그고 역습에 의존하는 수비 중심의 축구가 유행했다. 또 공격과 수비의 거리도 좁아졌다. 압박축구의 효시로 인정받는 아리고 사키 전 AC밀란 감독은 당시 “디에고 마라도나의 플레이는 신기에 가깝다. 나는 그의 플레이를 어떻게 봉쇄하느냐에 중점을 두고 효율적인 압박축구를 고안해냈다”고 밝혔다. 사키의 압박축구는 공격-미드필드-수비 라인을 10~15m 정도로 좁혀 상대방 선수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최소화하는 전술이다.
승리에만 집착하는 축구를 두고 비난도 뒤따랐다. 우루과이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20세기 축구사가 대담성에서 두려움에 이르는 여행이라는 사실은 (점차 수비적으로 변하는) 전술의 변화다. 그 결과 지난 50년간 골인 평균치 수는 절반으로 줄었다”고 야유했다. 이성형 교수는 “그라운드를 뛰는 예술가들은 이제 정신없이 공을 따라다니는 독일 병정이 되었다”고 밝혔다.
축구의 역사를 바꿔쓴 마라도나가 이번 월드컵에는 아르헨티나의 감독으로 돌아왔다. 그의 독창적인 플레이만큼 신선한 전술을 기대했다면 무리한 욕심이었을까. 지역 예선에서 8승4무6패라는 저조한 성적을 거두며 간신히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역대 월드컵 2회 우승, 2회 준우승에 빛나는 전적에 견주면 초라한 결과였다. 지난 2008년 6월까지 1위였던 국제축구연맹(FIFA) 순위는 올해 들어 9위까지 떨어졌다. 지난 5월 그가 내놓은 국가대표 최종 선발 명단에도 논란이 따라붙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하비에르 자네티와 에스테반 캄비아소가 명단에서 빠졌다. 우리 대표팀으로 치면, 이영표와 기성용을 뺐다고 생각하면 된다. 자네티와 캄비아소는 지난 5월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한 인터밀란의 핵심 전력이다. 이들은 전세계 어느 팀에 가도 주전 자리를 꿰찰 수 있는 특급 선수들이다. 둘째, 대표팀 명단에 포함된 수비수 7명 가운데 측면 수비수 전담 요원은 클레멘테 로드리게스 한 명뿐이었다. 측면 쪽에 구멍이 뚫렸다는 뜻이다. 특히 대표팀 경험이 거의 없는 30살의 중앙수비수 아리엘 가르체가 깜짝 발탁됐다. 그가 속한 팀인 콜론은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14위 팀이다.
환영받지 못하는 감독으로 돌아온 마라도나
설이 분분하다. 마라도나가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꿈을 꿨는데, 그 속에서 유일하게 기억나는 얼굴이 가르체였다는 것이 그의 깜짝 발탁의 원인이라고 은 전했다. 심지어 아르헨티나 팬들도 그의 ‘창의적’ 발탁에 야유 섞인 농담으로 화답했다. 지난 5월 캐나다와의 A매치가 열린 경기장에는 “가르체, 귀국할 때 알파호르 좀 사와라”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걸렸다. 알파호르는 아르헨티나에서 여행 기념품으로 사오는 과자로, 우리로 치면 호도과자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은 “월드컵 우승 후보군 사이에서 아르헨티나가 살짝 밀려나는 가장 큰 원인은 마라도나”라고 분석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참고 문헌: (민음인), (책이있는마을), (길), (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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