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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에는 ‘막소사주’

등록 2009-05-28 11:31 수정 2020-05-03 04:25
비 오는 날에는 ‘막소사주’

비 오는 날에는 ‘막소사주’

요즘 술을 마실 때마다 새삼 내가 시골 출신임을 절감하곤 한다. 일단 시대적인 대세라는 와인은 별로다. 와인도 술인 만큼 주는 잔 사양하는 법은 없지만, 술 자체에 빠져본 적은 없다. 또 ‘작업’을 위해선 와인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에 동감하지만, 와인 좋아하는 ‘언니’에게 ‘필’이 꽂힌 적도 없다.

이와 반대로 날이 갈수록 좋은 술이 있으니, 바로 막걸리다. 그도 그럴 것이, 술 가운데 막걸리와 쌓은 인연이 제일 오래됐다.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는 술에 취해 귀가하면 꼭 잠자던 나를 깨워 막걸리 심부름을 시키곤 하셨다. 그러면 나는 눈 비비며 일어나 인근 동네 구멍가게들을 순례해 어떻게든 막걸리를 구해와야 했는데, 그때마다 막걸리병 주둥이를 쪽쪽 빨며 달빛이 비치는 골목길을 걸어오곤 했다. 물론 표나지 않을 정도만 마셔야 했는데, 당시 막걸리병 뚜껑엔 아주 조그만 숨구멍이 뚫려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뒤 우연인지 운명인지 막걸리를 교주(校酒)로 삼는 대학엘 갔다. 대학 시절 원없이 막걸리를 마셨건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금도 주변엔 막걸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를 꼽아보라면 카페에서도 ‘막걸리를 사다 달라’고 부탁하는 검찰 고위 인사 K다.

그런데 K도 검사여서 그런지 순수 막걸리보다는 혼합(폭탄)주를 즐긴다. 막걸리에 소주, 사이다를 섞어 만든 ‘막소사주’가 그만의 특기다. 지적재산권 침해가 우려되지만 그 제조법을 소개해본다. ① 맥주잔 안에 소주잔을 넣는다. ② 소주잔에 제조자의 취향만큼 소주를 붓는다. ③ 맥주잔의 9부까지 막걸리를 붓는다. ④ 맥주잔의 나머지 1부는 사이다로 채운다.

이렇게 하면 맥주잔 하나 가득 찰랑찰랑한 막소사주가 완성된다. 너무 간단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막소사주를 원샷 했을 때의 맛은 ‘양폭’(양주 폭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구수하면서도 달달한 맛이 입 안에 착 달라붙는 게 일품이다.

지난해 이맘때, 언론재단 탐사보도 단기 연수 과정을 함께 밟던 타사 기자 10여 명에게 이 술을 소개한 적이 있다. 지금은 철거된 해장국집인 서울 종로구 청진옥에서 ‘K표 막소사주’를 제조해 돌린 것이다. 반응은 매우 좋았다. Y방송 선배는 “어릴 적 시골 외할머니 집에 갔을 때 맛봤던 바로 그 술맛”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다른 기자들도 “생각보다 괜찮은걸”이라며 연거푸 잔을 들이켰다.

하지만 이튿날 상황은 180도 변했다. K본부의 한 기자는 강의에 결석했으며, K신문 기자는 테이프가 끊겨 지갑을 잃어버렸다. 다른 기자들도 오전 강의 내내 쓰린 배를 부여잡으며 한스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렇다. 막소사주의 유일한 단점이 있었으니, 사이다와 막걸리의 달달한 단맛에 알코올맛이 감춰져 음주자로 하여금 마구 잔을 들이켜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앉은뱅이술’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위험에도 막소사주의 감칠맛은 너무 강한 유혹이다. 특히나 오늘처럼 비라도 추적추적 내리는 날에는, 파전에 ‘K표 막소사주’ 한 사발 생각에 마감에 차질이 빚어질 정도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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