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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사이 버스는 떠나고

등록 2009-05-16 11:01 수정 2020-05-03 04:25
잠든 사이 버스는 떠나고

잠든 사이 버스는 떠나고

지금까지 기자가 된 뒤 음주와 관련해 겪은 에피소드를 풀어놨지만, 고백건대 나의 술 편력은 집안 내력인 듯도 하다. 어렸을 적 어머니는 동네 앞산을 가리키며 “너희 아빠가 마신 술이 아마 저 산만큼은 될 거다. 너는 제발 술은 마시지 마라”며 한숨을 쉬곤 했다. 하지만 그런 ‘설교’가 알코올 DNA를 변환시킬 수는 없었다.

대학 때 하루는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두 살 터울의 여동생에 대한 한탄이었다. “너는 몰라도 네 동생까지 이럴 줄은…. 어이구 내 팔자야….”

어머니에게 들어본 사정은 이랬다. 대학 새내기 환영회 때 만취한 동생은 차비도 없이 택시를 불러 타고 집에 왔더랜다. 어머니는 ‘택시비를 가지고 집 앞으로 나와달라’는 동생의 전화를 받고도 나가지 않으셨다. 버릇을 잘못 들일까봐서였다. 그런데 동생이 갑자기 현관문을 밀고 들어오며, 뒤를 가리키면서 쓰러지더라나. 택시비를 내달라는 뜻인 줄 알고 밖으로 나간 어머니는 당혹스런 장면을 목격해야만 했다. 택시 안이 동생의 토설물로 가득했던 것. 어머니는 야밤에 세수대야에 물을 담아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몇 차례씩 오르락내리락거려야만 했다.

막내 여동생도 사정은 비슷하다. 2000년대 초 어느 연말 우리 삼남매는 집에서 송년 술자리를 가졌는데, 이튿날 거실 천장과 벽에는 휴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회오리주를 만들 때 생긴 젖은 휴지를 벽에 던지는 주점에서의 풍습이 집 안에서 그대로 재연된 것이었다.

비슷한 즈음, 한번은 주말에 여동생들의 남자친구들까지 불러 고향 집에서 술자리를 가졌다. 이튿날 아침 일찍 나와 여동생 남자친구는 출근을 하기 위해 함께 서울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물론 버스에 타자마자 잠이 들었고, 휴게소에서 잠시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온 뒤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기사가 와서 깨우는 것이 아닌가. 차표를 본 기사가 말했다. “이 차는 김제에서 출발했거든요. 잘못 타셨네요.”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새로 도착해 주차해 있던 다른 버스에 올라타 잠을 청한 것이었다.

버스에서 내려보니 휴게소가 황량했다. 천안∼논산 고속도로가 개통된 지 며칠되지 않은 때여서 휴게소에는 차가 거의 없었다. 그때 휴게소 건물 쪽에서 여동생의 남자친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형님, 어디 계셨어요? 한참 찾았는데….”

버스를 놓친 우리 둘은 다음 버스를 기다려 얻어타고 서울로 왔다.

그런데 이날 저녁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으이구~, 오빠 때문에 창피해서 못 살아.” 알고 보니 동생 남자친구는 휴게소 행방불명 사건을 동생에게 설명하며 “아마 여자 화장실에서 자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럴 법도 했다. 황량한 휴게소에서 사람이 한 명 없어져 방송도 여러 차례 하고 온갖 곳을 다 뒤졌건만 찾아내지 못했으니, 내가 다른 버스에서 내린 것을 보지 못한 그 친구로서는 ‘자신이 뒤져보지 않은 유일한 곳’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는 이날 동생에게 전후 사정을 다 설명했지만, 동생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지금도 동생은 “아무리 술이 취해도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서 자지는 말라”며 진심어린 충고를 하곤 한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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