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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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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보다 술잔

한강물이 다 술이라도 술잔 없으면 못 마시네…
다양하게 진화한 동서양의 술잔들
등록 2009-04-09 11:25 수정 2020-05-03 04:25
임동환(42·사진 오른쪽)씨. 사진 김학민

임동환(42·사진 오른쪽)씨. 사진 김학민

서영춘 선생의 사설을 빌리자면, 인천 바다가 사이다라 해도 ‘고뿌’가 없으면 못 마시는 것처럼, 한강물이 술이라 해도 술잔이 없으면 못 마신다. ‘고뿌’는 컵(cup)의 일본식 발음으로, 영어에서 컵은 대개 손잡이가 달린 찻잔을 뜻한다. 예외적으로 성찬식에서 포도주를 담는 술잔을 일컬어 컵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술잔은 대개 글라스(glass)라고 부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승전, 왕의 즉위나 결혼 등 나라의 경사가 있거나 축제라도 있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게 되고, 또 거기에서는 당연히 술을 곁들이게 된다. 그리고 의식이 진행되고 나면 참여자 전원은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 수장의 선창에 따라 축배를 들게 된다. 이때 수장은 경사의 공로자·수고자에게 술잔을 하사하거나 술을 부어줘 공을 치하하고 만인에게 그 신임을 공표한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스포츠 경기에서 우승팀이나 우승자에게 우승의 징표와 인증으로 우승컵을 주는 관례로 된 것이다.

서양의 술잔은 ‘글라스’라고 하는 데서 유리가 그 재질임을 알 수 있다. 위스키를 마실 때 쓰는 작은 술잔은 올드 패션드 글라스 또는 록 글라스라 하고, 이 밖에 칵테일 글라스, 리큐어 글라스, 샴페인 글라스, 와인 글라스, 셰리 글라스, 콜린스 글라스, 사워 글라스, 브랜디 글라스 등이 그 모양을 달리한다. 또 우리가 흔히 컵이라고 부르는, 진토닉이나 소프트드링크에 사용하는 텀블러(tumbler)가 있고, 텀블러에 발을 붙인 모습 같은, 맥주나 소프트드링크, 얼음을 가득 채운 칵테일에 사용하는 고블릿(goblet)도 있다. 양주잔의 경우 일반적으로 향기가 강하거나 그렇게 감미롭지 않은 술을 마실 때는 잔 주둥이가 넓은 글라스를 사용하고, 향기가 약하거나 은은한 술을 마실 때는 향이 모아져야 술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으므로 튤립처럼 잔 주둥이가 오므라진 글라스를 사용한다. 저그(jug)는 밑바닥이 평평하고 손잡이가 달린 잔으로, 흔히 생맥집에서 ‘조끼’라고 부르는 술잔이다. 맥주는 알코올 농도가 낮아 입 안에서 음미하지 않고 단번에 시원하게 목으로 넘겨야 그 맛을 만끽할 수 있으므로, 저그잔은 당연히 크고 마시기 좋게 주둥이가 넓다.

서양 술잔이 재질은 한가지인데 술의 종류에 따라 모양이 달랐다면, 동양 술잔은 모양은 비슷했지만 재질에 따라 이름을 달리했다. 한자에서 잔(琖)은 옥·수정·곱돌 등 석재를 갈아 만든 술잔이고, 배(坏)는 토기·청자·백자·분청 등 흙을 원료로 구워 만든 술잔이다. 배(杯)는 나무를 깎아 만든 술잔이고, 작(爵)은 금·은·청동·금동·쇠·구리 등 금속을 가공해 만든 술잔이다. 잔(盞) 또는 배(盃)는 ‘그릇 명’(皿) 변이 들어간 데서 보듯, 불로 구운 도자기 재질을 뜻하면서 굽이 있는 잔임을 나타낸다. 또 술잔의 크기에 따라 한 되들이 잔은 작(爵), 두 되들이 잔은 고(觚), 석 되들이 잔은 치(觶), 넉 되들이 잔은 각(角), 닷 되들이 잔은 산(散)이라 하기도 했다.

임동환(42·사진 오른쪽)씨는 민족무예 태껸 전수관을 운영하면서 한편으로 전통 방짜 유기의 전승과 실용화에도 온 힘을 쏟고 있는 사람이다. 놋쇠는 주석 22%, 구리 78%의 절묘한 합금으로,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그릇·제기·악기 등을 만드는 데 써왔다. 놋쇠는 열전도율이 낮아 그릇이나 잔으로 사용할 경우 따뜻함과 차가움을 유지하는 시간이 길고 살균 작용도 한다. 임씨는 이에 착안해, 값비싼 서양의 주석잔을 대신할 수 있는 놋쇠 맥주잔을 만들었다. 그리고 끝내는 호프집 ‘짬’(경기 시흥시 대아동 531-2 신주씨티프라자 2층, 문의 031-316-6289)까지 열어 놋쇠잔의 효능을 시험하고 있는 중이다. ‘짬’을 취재하면서 시흥의 지인 몇몇을 불러 ‘놋쇠잔 맥주맛’을 평가하게 했다. 결과는 더 맛이 있는 것 같다는 사람이 절반이다. 나머지도 맥주맛이 더 좋은지는 모르겠으나 놋쇠잔이 품격 있고 특이해서 좋다고 한다. 임씨에게 이만하면 놋쇠잔 효과를 본 것 아니냐 하니, 손님들이 술보다 술잔이 더 좋은지 가끔 한두 개 없어지는 것이 걱정이란다.

김학민 음식 칼럼니스트 blog.naver.com/hakmi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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