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발간되고 있는 이란 월간지가 있다. 표지까지 합해도 84쪽밖에 안 되는 자그마한 잡지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야말로 주옥같은 글들로 꽉 채워져 있다. 서민들의 삶과 생각에 친근한 테마를 골라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하는 기획특집, 전라도 각 지역 오일장의 오래된 풍경 이야기, 노인뿐이지만 인심 넉넉한 전라도 구석구석의 농촌 기행, 예향 호남의 자존심을 전하는 문화예술 한마당 등 매호마다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사연들이 구수한 생짜 전라도 사투리로 독자들의 가슴을 잔잔하게 적셔준다.
나는 이 우편으로 부쳐져 오면 거대담론 하나 없는 이 잡지가 하도 재미있어 어느 때는 하룻밤 사이에 기사는 물론 광고까지 모두 읽어버린다. 이 잡지에는 2007년 재창간 때부터 지금까지 각 호의 마지막 페이지에 ‘소야촌’이라는 식당의 1단 광고가 실려 있다. 그런데 그 홍보 카피라는 것이 자기 식당 음식 맛이 좋다는 것인지 아닌지, 그래서 꼭 오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보는 이의 마음을 헷갈리게 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입 틀어막는다고 말 안 합디여? 숨어서 말한다고 모릅디여? 나랏일 허는 사람이 즈그들 밥그륵만 챙기믄 쓰갔소?”(2009년 5월호)
“하루해 뉘엿거린디, 그 짜투리에 서서 더듬거림서 온 길 돌아본께, 이파리 떨어진 가을 신작로맨키로 텅 비었네.”(2008년 10월호)
“놈이 안 본디서 잘 해야겄습니다. 사람들은 안 본 것 같아도 다 알아불드만요.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겄습니다. 사람들은 안 들은 것 같아도 다 알아불드랑께요.”(2008년 6월호)
이 홍보 카피가 소비자의 구매 욕구를 자극해 손님들을 얼마나 많이 오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이 광고를 보고는 광주에 갈 기회가 있다면 ‘소야촌’에 꼭 들러볼 작정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올해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 즈음에 이런저런 일로 광주에 가게 되었다. 광고에 나온 “금호지구 시비에스 뽀짝 옆에”라는 ‘소야촌’의 위치 설명 중 내가 해독하지 못한 ‘뽀짝’은 전라도 토종 후배를 통해 ‘바짝’이라는 뜻이라고 확인받았다.
소야촌(素野村)은 씨 뿌리기에 앞서 펼쳐져 있는 하얀 들판, 나락을 거둬들인 뒤에 펼쳐진 하얀 들판을 뜻한다. 주인장 김요수(44)씨는 원래 담양에서 같은 이름의 찻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찻집이 좀 되는 듯하자 집주인이 욕심을 부려, 거기에서 나와 김치공장을 경영하다가 현재의 식당을 열게 된 것이다. 이 집은 ‘찹쌀과 엄나무가 만나서 청주가 된 엄나무술’이 기가 막히게 좋다. 전부터 찹쌀막걸리를 쭉 담가왔는데, 우연히 약재로 사온 엄나무가 술독에 빠진 것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걸러보니 일품이더란다. 색깔이 나지 않아 고민하기에 지초를 같이 넣어 담가보라고 권했다.
소야촌의 차림표 음식 이름을 보면 음식을 만든 사람의 마음씨와 정성이 바로 환하게 떠오른다. ‘아삭한 콩나물에 매콤한 해물찜’ ‘한약재로 기름기 쫙 뺀 삶은 고기와 홍어’ ‘탁 까서 한 입에 척 묵는 찐 새우’ ‘하나하나 손질한 돌판 장어’ ‘노릇노릇 먹음직스런 생선구이’ ‘쫄깃쫄깃한 참꼬막’ ‘잘 다진 소고기와 돼지고기에 갖은 양념을 한 떡갈비’ ‘몸이 먼저 알아보는 맛난 버섯죽’ ‘소야촌에서 직접 담근 우리 차’ ‘계절에 따라 나오는 과일’ 등 긴 음식 이름이 재미있다.
김요수씨는 “광주의 식당들은 웬만하면 맛이 다 있다. 전라도 사람들이라면 웬만하면 맛을 다 낼 줄 안다. 그러나 식당이 맛있는 음식과 술만으로 승부해서는 안 된다. 식당·술집은 손님들이 시간에 쫓기지 않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랑방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소야촌은 그러한 생각에 맞추기 위해 그가 손수 설계해 지은 단층 건물이다. 숟갈을 놓자마자 자리를 서둘러 비워줘야 하는 ‘테이블 회전’을 생각하지 않고 5개의 방만 꾸며 저녁에도 서너 팀 외에는 예약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분위기에 좀 까다로운 광주의 학계, 문화예술계, 언론계 등 지식인층이 주로 애용하는 곳이 소야촌이다. 문의 062-431-3693.
김학민 음식 칼럼니스트 blog.naver.com/hakmi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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