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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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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모든 강은 ‘새벽강’으로 흐르네

전라도 양반 동네의 문화예술인·사회운동가들이 2차 때 단골로 찾는 술집…
집주인의 소리 한 자락은 덤
등록 2009-08-15 10:26 수정 2020-05-03 04:25
전주의 모든 강은 ‘새벽강’으로 흐르네. 김학민

전주의 모든 강은 ‘새벽강’으로 흐르네. 김학민

인터넷 매체 은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오프라인에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인간의 삶에 깊이와 색채를 더해주는 것이 인문학인데, 그 인문학을 즐겨 공부하고 즐겨 생각하게 하는 문화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 인문학습원을 운영하는 것이다. 인문학습원은 국토학교(교장 소설가 박태순), 미술사학교(〃 서양미술사학자 노성두), 신화학교(〃 한국외대 교수 유재원), 미술심리학교(〃 미술치료사 박승숙), 앤티크학교(〃 자유여행가 김재규), 이슬람학교(〃 한양대 교수 이희수), 인도학교(〃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 이거룡), 중남미학교(〃 외교안보연구원 객원교수 이성형)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인문학습원은 지난 6월 1박2일 일정으로 전북 전주의 역사와 문화예술, 한지, 한식, 소리 등에 대해 강의를 듣고 체험하는 ‘전주학교’를 열었다. 전주학교가 열리기 전에도 전주의 문화와 멋을 사랑하고 널리 알리자는 모임인 ‘천년전주사랑’에서 비슷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더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전주 역사문화 답사 과정이 마련된 것이다. 전주 토박이로 전주학교 교장을 맡고 있는 이두엽 군산대 겸임교수가 사근사근 설을 푸는 전주 이야기, 전주로의 초대 말씀은 이렇다.

“전주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입니다. 누구에게나 고향 같은, ‘고향지수’가 아주 높은 곳이지요. 나지막한 한옥 담장 햇살 가득한 골목길에서 오래전에 잃은 나를 찾을 수 있는 곳입니다. 전주 막걸리를 마시면 네 번 취한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흥에 취하고, 두 번째는 안주에 취하고, 세 번째는 맛에 취하고, 네 번째는 정에 취한다고 합니다. 막걸리뿐 아니라, 전주에 오면 네 가지 취할 거리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운 한옥 골목길이요, 둘째 ‘간장(肝腸)의 눈물’을 토해낼 만큼 애절하면서도 ‘금세 숨이 탁 막히게 벌어지는 사랑놀이’처럼 흥미진진한, 옹골차고 푸진 우리 소리요, 셋째 심성 고운 여인네들의 섬세한 손맛이요, 넷째 천지만물에 깃든 한울을 공경하고 모시는 ‘전라도의 속 깊은 마음’입니다.

의 작가 최명희는 전주를 ‘꽃심의 땅’으로 불렀습니다. 꽃의 심(心),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운을 다해 꼿꼿이 버텨온 땅이 전주입니다. 동학혁명의 중심 지역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자치기구인 집강소가 설치됐던, 자유와 평등의 꽃이 한때 피었던 곳입니다. 전주는 또한 전통문화의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함)을 꿈꾸는 도시입니다. 전통문화는 우리들 삶을 든든하게 하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또한 우리들 마음을 너그럽게 적시는 ‘샘이 깊은 물’과도 같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삶의 근본이 되는 전통문화를 잊고 살았습니다만, 힘겹게나마 이를 껴안고 지켜온 도시가, 바로 여러분이 사랑하는 천년의 도시 전주입니다.”

‘새벽강’(063-283-4388)은 전주시 경원동 한옥거리 부근에 있는 ‘24시 술집’이다. 풍물미학자 김원호, 시인 박남준 등과 함께 풍물패 ‘갠지갠’ 활동을 했던 강은자씨가 20여 년 전 전주의 문화예술인, 민주화운동권, 사회운동가들의 사랑방 삼아 연 집이다. 새벽강은 특별한 민속주나 칼칼한 전라도식 안주가 있는 집은 아니다. 그러나 밤이 이슥해 ‘2차 타임’이 되면 작은 개천이 큰 강으로 모이듯, ‘맛있고 멋있는 전주 각계 사람들’이 여기로 몰려들어, 끼리끼리 노무현에, 이명박에, 정동영에 침방울을 튀기기도 하고, 한옥·한지·한식을 어떻게 가꿔 발전시킬 것인가로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리기도 한다.

새벽강의 하이라이트는 언제나 북장단에 맞추어 부르는 강은자씨의 우리 소리 한마당이다. 이때쯤에는 걸걸한 전라도 소리 한 자락 뽑는 사람, 사뭇 비장하게 운동가요를 합창하는 사람들, 흘러간 가요를 맛깔스럽게 부르는 사람으로 작은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 새벽 5시 새벽강이 문을 닫을 즈음이면 손님들은 강물이 흘러가듯 같은 동네 콩나물해장국집들로 끼리끼리 흩어지고, 오래된 도시 전주에는 또다시 하루가 시작되는 해가 떠오른다.

김학민 음식 칼럼니스트 blog.naver.com/hakmi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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