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헌팅턴은 그의 저서 에서, 세계를 기독교권·중국·아프리카·아랍 등으로 나눠 조명하고, 앞으로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 중국이 크게 부상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런 흐름에서 현재 중동에서 벌어지는 분쟁은 미국을 중심축으로 하는 서구 문명의 진출과 이에 조응하는 아랍 이슬람 문명의 충돌이다. 하지만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은 현재의 중동전쟁이 18세기 이래 서구제국이 벌인 무자비한 영토 확장과 식민지 쟁탈, 석유 등 자원 갈취라는 탐욕의 역사에 그 뿌리가 있음을 간과하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적·문화적 갈등 현상으로만 설명하려는 한계가 있다. 헌팅턴은 냉전 종식 이후 달라진 세계정치의 성격을 규명하려는 시도로 ‘문명충돌론’을 제기했지만, 이 책에는 서구와 비서구 사이의 문화적 질서와 그 재편 문제도 함께 다루고 있다.
한 사회의 전통문화가 침체되거나 멸실되는 데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대개는 느슨한 전통사회에 막강한 외세가 들어오고 이를 등에 업은 외래문화가 침투해 착근하면서 토착 전통문화는 서서히 그 생명력을 잃어가는 식으로 전개된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세계 각 사회의 문화적 층위가 그 특성과 고유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전통사회에 외래문화가 도입되더라도 문화끼리 충돌해 전통문화가 쇠미해져 사라지기보다는 외래문화의 내용을 습합·수용해 변증적으로 새로운 문화로 발전해갔다. 그러나 산업혁명으로 서구사회가 물질문명을 독점하고 범세계적으로 주도권을 쥐어가자, 덩달아 서구문화가 비서구문화를 지배·압도하며 문화질서를 재편하게 됐다.
술은 음주문화와 마찬가지로 해당 사회의 문화적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등 우리 전통술의 제조법을 기술한 전적들을 보면 조선조 말까지 100여 가지 술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기록에는 고려시대에 포도주 등 12가지 술이, 조선시대에 천축주 등 74가지 술이 외래 술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조선 말기까지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은 외래 술은 없었다. ‘문명충돌론’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1천여 년 동안 우리 전통술 100여 가지와 외래 술 100여 가지가 충돌했는데 나중에는 전통술만 남았으니 곧 외래문화에 대한 전통문화의 승리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다양했던 우리 전통술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술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다. 술을 음식의 하나로 간주했으므로 김치 담그기처럼 술 빚기에 정부가 간섭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1904년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이던 일본인이 일본을 따라 주세법을 구상하고, 1909년에 그 법이 반포됐다. 판매용·가용(家用)을 가리지 않고 양조 면허제가 도입되고, 그 생산량에 일종의 간접세를 부과해 정부 통제를 강화한 것이다.
1910년 한-일 병탄 뒤 일제는 종래의 주세법을 주세령으로 고쳐, 가용 술에는 고율의 세금을 매겨 억제하고 양조업자에 의한 화학주의 대량생산만 가능토록 정책을 펴나갔다. 이때의 발효 가양주(家釀酒)의 근절, 바로 이 때문에 우리 전통 명주들이 사라지고 조선인 수탈의 수단으로서 화학주만 남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반세기가 지나기까지 술은 식량 부족의 원흉이거나 손쉽게 거둘 수 있는 세금의 원천일 뿐이었으니, 국권 회복은 되었으되 가양주의 회복, 전통문화의 복원은 요원했던 것이다.
충남 홍성군 서부면에서 낚싯배를 운영하는 김병채씨는 아주 기가 막힌 가양주를 개발했다. 찹쌀을 원료로 해 밑술을 담근 뒤 여기에 인삼·구기자·감초·당귀 등 한약재를 넣고 두 번을 더 발효시킨다. 지금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지만, 20여 년 전 동동주를 마시고 너무 머리가 아파 직접 술을 개발했다 한다. 이 술은 아무리 마셔도 뒤가 깨끗하고, 냉장 보관하면 몇 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 특허를 냈지만 대량생산은 못하고 있다. 경기 용인시 이동면에서 동생 김병기씨가 운영하는 ‘전라도홍어집’(031-334-4477)에 가면 ‘민속맑은술’이란 어정쩡한 이름의 이 술을 시음할 수 있다.
김학민 음식 칼럼니스트 blog.naver.com/hakmi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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