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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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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술집 ‘주막’의 근대성

술과 장작만 있던 주점이 화폐 유통과 더불어 식당·여관을 겸한 영업집으로
등록 2009-11-11 02:39 수정 2020-05-02 19:25
우리나라의 마지막 주막 ‘삼강주막’. 김학민

우리나라의 마지막 주막 ‘삼강주막’. 김학민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술을 마신다는 행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특별한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대개 술자리에서 손님은 상징적으로 초대자의 가족공동체로 받아들여진다. 주인·손님을 불문하고 참석자 모두는 최소한 술 마시는 동안만은 성공을 축하하며, 건강을 기원하며, 서로의 우애와 친목을 도모하며,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단결을 다지며 하나의 집단처럼 단단히 묶여진다. 이러한 고전적 술자리의 의미는 술을 공개적으로 마실 수 있는 술집에서 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그리하여 술집에서는 술집 밖의 일상적·시민적 삶과는 전혀 다른 법칙과 규칙들이 지배한다.

술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 알건 모르건 다른 사람을 이야기에 끌어들일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상대도 말을 걸어오면 응답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 술집 입구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누구나 문지방을 건너오는 사람은 술집에 머무르는 동안 모르는 사람과도 대화할 준비가 돼 있음을 암묵적으로 승인한다. 손님들은 연령에 상관없이 열려 있는 인물로서 술집에 들어온다. 그것은 술집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거는 데 열려 있고, 스스로가 그런 접촉을 통해 친교할 수 있을 정도로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열려 있다는 점에서 술집은 고전적이지만, 여기에서 제공되는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값을 치러야 하는 점에서 술집은 근대적이다.

주막(酒幕)은 고전성과 근대성 두 모습을 띤 우리의 전통 술집이었다. 조선시대 시골길의 큰 길목이나 고개 아래, 장터, 나루터에는 반드시 주막이 있어서 나그네의 허기와 갈증을 풀어주었다. 마당에 좌판을 펼쳐놓고 쇠머리나 돼지족 삶은 것을 늘어놓고 초가지붕 위로 바지랑대에 용수를 높이 달아놓은 집이면 주막임이 틀림없다. 주막은 현대적 의미로 볼 때 술집과 식당, 여관을 겸한 영업집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우리나라 역대 기녀들에 관계되는 모든 실상을 밝힌 이능화(李能和)의 (朝鮮解語話史)에는 주막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려 숙종 9년(1104) 주식점(酒食店)을 열어 화폐의 유통을 꾀하였으나 실패하고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도 역시 화폐가 쓰이지 않으니 여행자는 양식을 갖고 다녀야 할 지경이었다. 선조대에 윤국형(尹國馨)이 지은 (聞韶漫錄)에 따르면 ‘영호남의 대로에 주점이 있기는 하나 술과 장작이 있을 뿐이다. 여행자는 식량과 여행 필수품을 말에 싣고 다닌다. 명나라 장군 양고(楊稿)가 중국처럼 노변에 생활필수품을 파는 가게를 만들자고 권하니 수령이 명나라 군인이 지나가는 길가에 관에서 노점을 차려두었다가 그들이 지나간 후 거두어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효종대 이후부터 화폐가 점점 유통됨에 따라 음식도 팔고 접대하는 여자도 있는 주막이 생겨난 것이다.”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의 낙동강·내성천·금천이 만나는 수려한 경관의 세물머리에 우리나라 마지막 주막이 남아 있다. 1900년 전후 세 물길이 만나는 삼강리 나루터에 세워져 소금과 쌀, 소소한 생활필수품 등을 이고 지고 오가던 보부상·장돌뱅이는 물론, 근교의 시인 묵객, 서울로 향하는 나그네들의 허기와 갈증을 풀어주던 곳이다. 100년이 넘게 명맥을 유지해오던 ‘삼강주막’은 제2대 주모이자 ‘낙동강의 마지막 주모’로 불렸던 유옥연 할머니가 2005년 90살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발길이 끊겼다가, 2008년 1월 예천군에 의해 수리·복원돼 현재 삼강마을 부녀회가 운영하고 있다.

예천은 음식에 관한 경상도의 ‘악명’을 훌쩍 뛰어넘은 곳이다. 묵은 김치와 돼지고기를 채 썰어 양념해 볶다가 멸치 삶은 국물을 자작하게 붓고 메밀묵이나 도토리묵, 청포묵을 채로 썰어 올려 끓여 국물이 닳아지면 김치 썬 것을 올려 끓이면서 먹는 태평추(탕평채) 전문 ‘전국을 달리는 청포집’(054-652-0264)도 특별하고, 백수정육식당(054-652-7777)의 예천 한우 육회는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육회 400g 2만원, 육회비빔밥 1만원). 지난 10월14일 예천이 고향인 강남대 김필영 교수와 그 아들과 같이 ‘예천아리랑’ 복원 공연을 보러 갔다가 육회 한 접시, 비빔밥 세 그릇으로 소주를 세 병이나 비웠다.

김학민 음식 칼럼니스트 blog.naver.com/hakmi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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