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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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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칼 녹여 쟁기, 죽창 구워 죽력고

전봉준 장군이 치료차 마셨다던 대나무 진액으로 빚은 술…
‘조선 3대 명주’로 꼽히나 겨우 명맥 이어
등록 2009-07-17 12:01 수정 2020-05-03 04:25

“아! 재앙과 변괴가 일어나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국가정치의 순탄함이나 혼란에는 나름대로 주어진 운수가 있고, 일이 꼬이거나 풀리는 것은 순환되게 마련이다. 이런 일들은 비록 당시의 운세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결정된 것이라 바꿀 수 없다고는 하나 더러는 일을 담당한 사람들의 잘잘못에 기인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오랫동안 누적된 추세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일조일석에 조성된 것은 아니다.”

송명섭씨

송명섭씨

위 글은 1910년 한-일 합병 조약이 체결되자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어렵구나, 세상에서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가”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매천 황현의 저서 의 첫 구절이다. 100여 년 전 망국의 현실을 한마디로 압축한 이 구절은 시대의 흐름을 거꾸로 치달아가는 오늘의 이명박 정권과 맞닿으며, 매천 절명시의 비분과 강개는 한 세기를 지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피눈물 유서에 함축된다.

은 19세기 당쟁의 폐해, 동학농민전쟁의 시말, 일제의 침략과 항일의병 투쟁 등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동학농민전쟁에 대해서는 그 발단에서부터 관군과의 전투와 일본군의 개입, 전봉준 등 지도부의 체포, 농민군의 패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어 이 분야 연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전적이다. 이 책은 전봉준이 사로잡혀 서울로 압송되기 직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봉준은 지방관청의 관리들에게 모두 ‘너’ 또는 ‘자네’라고 하면서 꾸짖고 배척하며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압송 도중에는 푸른 대쪽을 불에 구워서 받은 진액과 인삼을 구하여 상처를 치료하였고, 쌀밥을 먹는 등 행동에 두려움이 없었고, 만약 조금이라도 자신의 뜻에 거슬리면 ‘내 죄는 종사와 관련되어 죽게 되면 진실로 죽을 뿐인데, 감히 너희 같은 것들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라고 꾸짖었다. 압송하는 사람들이 모두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대하였다.”

위 인용 중 체포 뒤의 고문 과정에서 망가진 몸을 추스르기 위해 녹두장군이 드셨다는 ‘푸른 대쪽을 구워서 받은 진액’은 바로 ‘죽력’(竹瀝)을 말한다. 죽력은 대나무를 쪼개 항아리에 넣고 황토와 왕겨를 이용해 간접 열을 쏘여 약 성분이 진의 형태로 흘러내린 액체를 말하는데, 전통적으로 대나무기름이라고 불려왔다. 한방에서는 예로부터 중풍과 반신불수에 긴요하게 써왔으며, 혈압을 다스리고 피를 맑게 하며, 담을 멎게 하고, 뇌졸중으로 인한 언어장애와 팔다리가 아픈 것을 치료하는 데 활용해왔다.

이 죽력과 다른 약재 서너 가지를 넣어 빚은 ‘죽력고’라는 술이 있다. 에는 ‘호서죽력고’라는 표현을 쓰고 있어 그것이 대나무와 연고가 있는 술이며, 호서 지방의 특주로 유명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에 보면 “(죽력고는) 대나무의 명산지인 전라도에서 만든 것이 유명하다. 청죽을 쪼개어 불에 구워 스며 나오는 진액과 꿀을 소주병에 넣고 중탕하여서 쓰는데 생강즙을 넣어도 좋다”고 그 제조법이 나온다. 최남선도 에서 평양의 감홍로, 전주의 이강고와 함께 죽력고를 조선의 3대 명주로 꼽고 있다.

그러나 우리 비전 가양주(家釀酒)들이 대개 그렇듯이, 죽력고도 한동안 문헌으로만 남아 있을 뿐 실제 술은 전해내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전북 정읍시 태인면에서 양조장을 경영하는 송명섭씨(사진)가 죽력고 내리는 법을 어머니 은계정(1917∼88)씨에게서 배워 재현했다. 그의 어머니는 할아버지 은재송(1864∼1945)씨로부터 죽력고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은씨는 전북 고부에서 한약방을 운영했는데, 늘 치료에 도움이 될 만한 술의 비방을 모아 죽력고 등 약술을 빚어 치료 보조제로 이용했다고 한다. 죽력고는 아직도 가내수공업적으로 가까스로 그 명줄을 이어가고 있다. 죽창이니, 죽봉이니, 죽대니 헛소리 말고 가물가물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전통술 죽력고나 좀 지원했으면 좋겠다. 문의 063-534-4018.

김학민 음식 칼럼니스트 blog.naver.com/hakmi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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