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09년 1월부터 놀며 공부하고, 공부하며 노는 ‘화백’이라는 어정쩡한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화백은 ‘진지하게 세상을 공부하고 즐겁게 문화와 만날 수 있는 열린 광장, 장년의 경륜과 지혜, 젊음의 감성과 열정이 소통하는 용광로, 민족공동체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고뇌하고 행동하는 만민공동회’임을 표방한다. 모임은 대부분 오프라인에서 열리지만, 운영은 회원들에게 일절 구속감을 주지 않도록 온라인식을 채용하고 있다. 그래서 거창한 정관이나 회칙도 없이, 다음의 ‘화백 약법삼장’에만 동의하면 누구나 이 모임에 참여할 수 있다. 첫째, 회원의 몫을 다한다. 둘째, 혼자서만 말하지 않는다. 셋째, 주정부리지 않는다.
화백은 중층적 의미를 갖는다. 모임이 매주 화요일 저녁(춘분~추분 7시, 추분~춘분 6시)에 열리기 때문에 ‘화’이고, 백수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고 또 백 명 곧 많은 사람이 참여할 것을 지향해 ‘백’이다. 또 ‘화백’에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옛 형태였던 신라시대 화백회의의 의미도 담겨 있다. 그래서 화백에는 회장이나 간부진 없이 몇몇 도우미만 두고 있다. 매주 화요일은 정해진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정기 모임이자 신라시대 화백회의처럼 전원회의가 열리는 날이고, 여기에서 회비를 책정하거나 시의적절한 다음 프로그램을 정한다.
화백에서 노는 것은 문화 체험이고, 공부하는 것은 강좌 듣기인데, 이 둘을 격주로 진행한다. 지난 1월20일 창립총회에서는 원로 언론인 임재경 선생의 2009년 시국 전망을 들었고, 2월3일에는 ‘오바마의 미국과 한반도의 운명’, 10일에는 모노드라마 관람과 배우와의 대화, 17일에는 강좌 ‘300만 실업시대의 한국’이 열렸다. 앞으로도 우리 소리 배우기, 독립영화 감상, 인디 음악인 초청공연 등의 프로그램과 ‘대한민국사 특강’ ‘너희가 미국식 교육을 아느냐’ ‘이명박은 왜 언론관계법 개정에 목매는가’ 등 눈 똑바로 뜨기 강좌가 이어진다(cafe.naver.com/tus100).
문화 프로그램은 공연장이나 극장에서 진행되겠지만, 그러면 강좌는 어디에서? 술집에서 열린다.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한 포근한 한옥 술집 ‘낭만’(덕성여대 평생교육원 담을 끼고 골목 안으로 80m, 02-741-5002)이다. 그리고 강좌가 술집에서 열리기 때문에 내 친구이자 화백의 회원인 조성우군 등 몇몇의 평소 행태를 모델로 삼아 토론 때 혼자서만 말하지 않기, 뒤풀이 때 주정부리지 않기의 약법삼장 둘째·셋째 조항이 들어간 것이다.
‘낭만’은 전통 한옥에, 방에는 주인의 그림쟁이 남편 덕인지 그럴듯한 유화도 몇 점 걸려 있어 제법 고상함과 운치를 느끼게 한다. 이 집을 연 지 아직 1년밖에 안 돼 제대로 자리를 잡기까지 상당 기간 어설퍼 보였지만, 충남 홍성군 갈산면 남당리 바닷가 출신의 유전자가 흐르는지 박영애 사장의 생태찌개, 홍어무침, 어리굴젓, 조개젓 등 갯것 다루는 솜씨가 일취월장했다. 좀 눅게, 그러나 깔끔하게 한잔 걸치려면 녹두지짐에 어리굴젓, 그리고 보성 녹차 막걸리를 추천한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긴급조치로 감옥살이하고 나온 제적 학생들, 자유언론을 외치다 쫓겨난 기자들, 독재권력에 밉보여 대학에서 추방당한 해직교수들이 즐겨 찾던 ‘낭만’이라는 맥줏집이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있었다. 매일 저녁 그곳에 가면 누가 정보부에 끌려갔는지, 어느 대학에서 시위가 일어났는지 등 은밀한 정보가 오갔고, 추방당한 자들끼리 서로서로 고단한 삶을 위로하며 희망을 나누었다. ‘관철동 낭만’이 낭만 속으로 사라진 지 어언 30여 년, 이제 다시 ‘경운동 낭만’에서 권력의 언론 장악, 독재와 민주주의, 참교육운동, 남북 문제, 실업 문제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는 돌고 도는가.
김학민 음식칼럼니스트·blog.naver.com/hakmi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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