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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리풍이 뉴진스 법원과 만났을 때

챗GPT 이미지 생성 모델 열풍은 ‘반짝인기’… ‘인지 자본주의’ 모순 더욱 강화될 것
등록 2025-04-04 21:20 수정 2025-04-07 13:17
샘 올트먼 오픈에이아이(AI) 최고경영자와 그가 챗지피티 이미지 생성 모델을 활용해 지브리풍으로 구현한 자신의 프로필 사진. 엑스(X) 갈무리

샘 올트먼 오픈에이아이(AI) 최고경영자와 그가 챗지피티 이미지 생성 모델을 활용해 지브리풍으로 구현한 자신의 프로필 사진. 엑스(X) 갈무리


오픈에이아이(AI)가 새로운 이미지 생성 기능을 도입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평소 챗지피티(GPT)에 무심했던 이들까지 너도나도 사용하면서 한동안 소원했던 오픈에이아이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대표인 샘 올트먼은 “우리의 지피유(GPU·그래픽처리장치)가 녹고 있다”는 메시지를 자신의 엑스(옛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이 해프닝은 지금까지 내가 지적해온 ‘인공지능 신화’의 진실을 잘 보여준다. 앞서 지적했듯이, 인공지능(AI)은 인간의 지능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이다. 평소 챗지피티 사용이 뜸했던 이들조차 챗지피티 기능을 이용해 한 번씩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스튜디오 애니메이션 화풍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보고 있다. 심슨이나 스머프 같은 다른 애니메이션 화풍이 가능했음에도 챗지피티가 이른바 ‘지브리 스타일’의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만들어내게 된 것은 ‘우연’이다.

판도라의 상자는 정말 열렸나

올트먼은 애초에 이용자들이 집중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모방한 이미지를 만들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이런 폭발적 반응에 대해 “아침에 일어나보니 ‘내가 너를 지브리 스타일로 만들었다’는 수백 개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고 진술했다. 이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간단하다. 아무리 훌륭한 인공지능을 만들어놓더라도 이용자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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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말을 곡해해서 인공지능을 많이 사용하도록 하기 위한 적극적인 홍보나 개입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주장할 수도 있다. 올트먼의 엑스 글은 일정 부분 이런 오해를 드러낸 것처럼 보인다. ‘지난 몇 년 동안 열심히 인공지능을 개발해서 사회에 공헌했건만 주변은 무관심하거나 미워했다’는 진술이 이런 심증에 확신을 준다. 과연 그의 불만대로 그가 기여한 인공지능 개발과 그 발전이 가져온 긍정적 변화를 제대로 평가하면 문제가 없는 것일까. 그러나 진짜 문제는 올트먼의 투정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이번 챗지피티의 이미지 생성 기능 탑재와 그에 대한 호응을 보고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나는 이런 판단은 좀 보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챗지피티, 정확히 말하자면 대형 언어 모델(LLM) 인공지능만이 인공지능의 모든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 모델을 일상에서 활용하는 행위 자체가 제한적이다. 과연 평소에 누가 이 인공지능을 냉장고나 전기밥솥처럼 ‘매일’ 사용할까.

대학에서 일하는 내 입장에서 챗지피티를 활용하는 이를 볼 기회가 다른 이들에 견줘 많다. 그럼에도 나는 이 인공지능을 매일 사용하는 이를 거의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나조차 검색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으면 혹시나 해서 질문해보는 정도다. 그리고 그 대답을 100% 신뢰하지도 않는다. 일단 대답을 얻으면 다른 앱들을 사용해 서너 번 검증한다. 딥리서치라는 기능이 나왔다고 하지만, 이른바 그 ‘심층 연구’는 인터넷에서 검색 가능한 정보에 근거해 작성된다. 페이월이 있는 정보는 접근할 수 없다. 이런 불완전성은 인공지능 산업과 지식재산권 사이에 엄연히 상존하는 긴장 관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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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과 인스타의 차이에 가까워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는 평가는 아마도 이용자의 입장에서 텍스트보다 이미지에 더 접근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의 차이 같은 것에 가깝다. 텍스트 위주로 작성하는 페이스북이 아무래도 일정한 사고와 쓰기 능력을 요구한다면, 인스타그램은 텍스트 없이 이미지만 올리더라도 충분히 관심을 끌 수 있다. 지브리 스타일을 선택한 ‘대중’의 취향이 인공지능의 활용과 연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앞서 지적한 ‘매일 사용할 필요가 없는 인공지능’이라는 이용의 제한성이 사라진다. 누구나 챗지피티를 인스타그램의 필터처럼 활용해 평소에 찍는 사진들을 변형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이론에 머무르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우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지 않으면 어떤 인공지능도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물론 이 말의 뜻은 인공지능 사용의 결정권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는 철학에서 오랫동안 논의해온 자유와 필연의 양가성에 얽혀 있다. 고대처럼 필연을 벗어난 자유의지를 믿은 시절도 있었지만 근대 철학자들은 자유와 필연이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변증법적 관계를 이룬다고 봤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이런 사회에서 우리가 자유를 얻고자 한다면, 일단 화폐의 법칙을 받아들여야 한다. 화폐의 법칙이라는 필연에 나를 구속시켜야 자유롭게 음식도 사 먹고 이동도 할 수 있다. 소셜미디어를 활용하고자 해도 마찬가지다. 내가 자유롭게 포스팅을 하려면 페이스북이든 트위터든 그 매뉴얼을 숙지하고 그 규칙을 따라야 한다. 이렇게 필연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나는 자유를 얻는다. 이런 생각을 인공지능 문제에 적용해보자.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우리는 인공지능을 통해 만들어지는 법칙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공지능을 활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마치 냉장고가 없으면 겪게 될 일들처럼, 화폐를 쓰지 않으면 이동조차 불편해지는 일처럼, 인공지능이 없다면 겪게 될 불편 같은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물론 인공지능이 없다면 우리가 활용하는 스마트폰의 기능이나 가전제품의 작동 방식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여러 기계 작동 방식에 여러 종류의 인공지능이 장착된 것은 사실이고, 이런 인공지능이 없다면 암 진단의 정확성이 떨어진다거나, 항공기 운항에 지장이 초래된다거나, 여러 종류의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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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레프트적인 이윤 축적?

그러나 챗지피티에 국한해서 본다면, 과연 이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우리 일상에서 그렇게 필수적인 기능을 제공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한창 읽기와 쓰기를 익혀야 할 학생들의 학습 기회를 박탈한다는 비판이 더 많았다. 이런 비판에 대해 올트먼이 “미움을 받았다”고 인식한다는 사실이 놀랍긴 하지만, 어쨌든 오픈에이아이도 이런 한계를 알았기 때문에 새로운 이미지 생성 기능을 선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고 일어나보니 달라져 있는 이 상황이 챗지피티를 둘러싼 논란을 잠재워줄 것 같진 않다.

게다가 오픈에이아이가 지브리나 다른 창작물 저작권자에게 해당 스타일 사용에 대한 승인을 사전에 받는 절차를 생략했고, 이런 문제가 계속 지적해온 저작권 관련 논란을 가중할 것도 자명하다. 물론 지식재산권 관련 법률의 한계를 챗지피티가 교묘하게 피해 가는 지점도 있고, 카피레프트 선언에서 확인할 수 있듯 저작권 개념 자체가 지식이라는 공유재를 자본 축적 장치로 승인하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이번 ‘지브리 스타일’을 둘러싼 광풍은 일도양단할 수 없는 난제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또한 수년에 걸쳐 공들여 제작한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을 데이터로 환원해 몇 초 만에 비슷한 이미지로 생성해내는 일이 과연 윤리적으로 합당한지에 대한 논란도 쉽게 잠재우기 어렵다.

아이돌 그룹 엔제이지(NJZ, 옛 뉴진스)가 2025년 3월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어도어의 광고 계약 체결 금지 및 기획사 지위보전 가처분 사건 첫 심문기일에 참석한 뒤 법원을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부터 하니, 민지, 혜인, 해린, 다니엘. 한겨레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아이돌 그룹 엔제이지(NJZ, 옛 뉴진스)가 2025년 3월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어도어의 광고 계약 체결 금지 및 기획사 지위보전 가처분 사건 첫 심문기일에 참석한 뒤 법원을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부터 하니, 민지, 혜인, 해린, 다니엘. 한겨레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이 모든 문제를 배경으로 놓고 나에게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챗지피티와 관련한 문제는 ‘전도된 유토피아주의’로 인해 초래되는 착시현상이다. 인공지능의 무한 발전이 가능하려면 지금 현재 자본주의의 이윤 추구 논리에 포섭된 저작권 문제를 재고해야 한다. 걸그룹 뉴진스를 둘러싼 논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누가 옳고 그르냐는 문제를 떠나 한국의 사법체제가 이들을 ‘아티스트’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품’으로 본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19세기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결코 상품은 홀로 시장의 무대에 오르지 않는다. 언제나 사법이라는 보호자를 대동해야 상품은 비로소 상품으로 교환 가능해진다.

인공지능 역시 상품으로 유통되려면 사법 판단과 함께 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계몽주의가 일찍이 정의했던 ‘지능’이라는 점에서, 태생적으로 카피레프트의 패러다임을 내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인공지능의 유토피아주의는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와 충돌한다. 다시 말해서, 모두가 무료로 제공하는 데이터를 수집해서 가공함으로써 이윤 구조를 만들어내는 파운데이션 모델은 1990년대 이후 지식재산권을 중심에 두고 발전해온 기존의 인지 자본주의 논리와 긴장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 산업의 한계 외려 도드라져

인지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일관된 패러다임은 지식을 통한 지식의 생산이다. 창조적 능력을 착취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 과정에서 지식은 상품 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상품과 지식의 호환을 손쉽게 지식의 상품화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이 구조는 지식을 명품 가방처럼 팔아서 이윤을 올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축적 과정은 재산권과 부의 확대를 재구성하는 것에 가깝다. 인지 자본주의에서 축적의 대상은 지식이고, 이 지식은 가치의 원천이자 동시에 가격 설정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지식 중심 경제는 전통적 의미의 노동 분업을 재구성하고 인터넷과 같은 데이터 수집 시스템을 통해 강화된 수평적 구조의 확산을 촉진했다.

이런 사정을 놓고 본다면, 지금까지 인공지능 개발이 인지 자본주의의 축적 구조 자체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전환점을 만들었다고 보기 어렵다.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방식도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기보다 기존 인지 자본주의의 축적 방식을 현상 유지하거나 강화하는 방향이었다. 빅테크 기업들이 인공지능을 도입한 뒤 직원을 대량 해고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결국 인공지능 산업은 인지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순을 극대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까닭에 인공지능 산업은 지속 가능한 재생산에 실패하게 될 것이다. 지브리 스타일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이에 따른 챗지피티의 반짝인기는 역설적으로 인공지능 산업의 한계를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만들고 있다.

 

이택광 문화비평가·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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