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무 살이라고 한다. 놀랐다. 아이가 태어난 뒤 내 새끼라 여기며 미운 정 고운 정 쏟아놓고는 정작 그 나이를 몰랐다. 인연에 무심한 내 게으른 습성을 잠깐 나무랐다.
아무튼, 그 스무 돌 즈음해 세계니 역사니 변화 같은 아주 추상적인 낱말을 들이대며 상당히 교묘한 강압으로 ‘선물’을 요구했다. 기꺼이 받아놓고는 고민하다보니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이 세계였고 역사였고 변화였다.
몇 년 안 된 아이가 뒤집어놓다보자. 타이 사람들이 즐겨 쓰는 속담 가운데 ‘완 프라 마이다이 미 혼디에오’(วันพระไม่ได้มีหนเดียว)란 게 있다. ‘(불교) 성일은 한 번만 있는 게 아니다’란 말인데, 한평생 살다보면 모두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으니 희망을 가지라는 속뜻을 지녔다. 1994년 이맘때쯤 첫 호가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제 뉴스로 동참할 때 선배한테 넌지시 했던 말이다. 사실은 ‘성공’ ‘안 성공’ 같은 건 다음 일이고 갓 태어난 아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걱정하던 위로용이었다. 근데, 이 아이가 날이 갈수록 황당해졌다. 걸음마를 떼더니 이내 업계에서 판매 부수 1등을 했고, 4~5년 지날 즈음엔 국제면을 아예 매주 25~35%씩 깔았다. 어떤 주엔 40%를 웃돌기도 했다. 바로 그 용감했던 대목을 말하고 싶다. 국내용 잡지가 국제면에 그토록 공들인 경우는 세계 언론사(言論史)에 유례가 없다. 믿기 힘들다면 아시아 대표로 인도네시아 도 좋고 미국 이나 독일 같이 이름난 잡지들의 국내판을 뒤져보시기 바란다. 이른바 세계적이라는 그이들 국제면도 어림잡아 5~10%에 지나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봐온 이 세상 모든 국내용 잡지란 건 거저 외신을 짜깁기해서 색깔 맞추기용으로 국제면을 까는 게 다였다는 뜻이다.
“독자들이 국제 뉴스에 관심 없다.” 이게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언론사들이 내질러왔던 똑같은 소리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국제 뉴스를 다룰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언론사들이 독자 핑계를 대며 그 독자들을 무시해왔다는 뜻이다. 그걸 태어난 지 몇 년도 안 된 아이가 뒤집었다. 편집부 안에서는 “독자들이 국제면을 읽는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제면을 좇는 독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동안 국제면 독자가 없지 않았다는 사실도, 독자들이 국제 뉴스에 갈증을 느껴왔다는 사실도 모두 그 신생아가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뿐만 아니다. 독자들이 국제면을 놓고 깊은 애정과 날카로운 비판을 퍼부어댔던 건 한국 언론사를 통틀어 첫 경험이었다. 그게 을 통해 벌어졌다. 지금껏 언론 연구자들이 눈여겨보지 않았을 뿐,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이건 국내 뉴스와 국제 뉴스를 놓고 뭐가 더 중요하다거나 옳고 그름 따위로 따질 대목이 아니다. 의 특장이었고 소비자에 대한 봉사였다.
한글도 모르는 사람들이 들고 나타나그 시절 외신에서 뛰던 나도 신날 수밖에 없었다. 뉴스뿐 아니라 기획 취재안도 올리는 족족 취재비용이 떨어져 마음껏 세상을 헤집고 다녔다. 심지어 환율이 두 배로 뛰어 국제 뉴스 취재 비용이 엄청나게 늘어났던 그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절에도 은 오히려 국제면을 더 키웠다. 국제 뉴스에 밥줄을 단 외신기자로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무렵은 돈줄이 마른 한국 언론사들뿐 아니라 1990년대 물 쓰듯 돈을 뿌려댔던 국제 언론들도 비즈니스 뉴스를 제외한 일반 국제 뉴스에서 발을 빼면서 비용을 대폭 줄여나가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렇게 해서 은 캄보디아, 동티모르, 아체, 코소보를 비롯한 국제 뉴스를 숱하게 표지에 걸고 나갔다. 국내 판매용 잡지로서는 예나 이제나 상상하기 힘든 일을 저질렀던 셈이다. 예컨대, 2003년 아체 관련 국제회의에서는 한글도 읽을 줄 모르는 참석자들이 아체 분쟁을 표지에 건 을 들고 증언대에 서기도 했다. 그 시절 은 아체 희생자를 표지 사진으로 걸고 18쪽이나 되는 현장발 기사를 감아올렸다. 이 인도네시아 정부의 취재 금지를 뚫고 외신으로서 유일하게 계엄군사작전 현장에 들어갔다는 것보다도, 국제 언론이 외면한 아체를 그렇게 크게 다뤘다는 사실을 놓고 외신판은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날고 긴다는 인도네시아 도 의 사진과 기사 정보를 받아썼다. 그게 이었다. 그게 우리의 자존심이었다.
세월이 흐른 모양이다. 말마따나 변하지 않는 건 없다는 사실 빼고는 다 변했다.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든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애정선도 바뀌어 국제면이 찬밥으로 시들어갔다. 뭐, 회사 사정이나 정책이나 편집장들 의지가 작용했겠지만 바깥에서 보기엔 만 가졌던 그 빛난 특장을 키워내지 못했다는 게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어쨌든.
되돌아보는 게 역사다. 잘나가는 놈들이 꼭 앞만 판 것 같지도 않고, 늘 새로워야 멋있는 것만도 아닌 듯하다. 남들이 하지 않는 걸, 못하는 걸 해온 이들이 결국 이 세상의 지평을 넓혀놓았듯이 이 이쯤에서 거창한 설계보다는 수줍게 뒤를 돌아볼 때가 된 듯싶다. 내 기억엔 이 기획도 기사도 사업도 가장 팔팔했던 시기가 국제면이 넘치던 때였다. 우연일까?
50돌에 빛나는 전통 넘길 수 있으려면달리 보면 세상도 변했으니 잡지가 변한들 울고불고할 것도 없지만, 이 흉포한 국제 자본과 국제 정치권력이 날뛰는 세상을 갈가리 파헤쳐주는 잡지가 하나쯤은 살아남아 저항했으면 하는 바람마저 버리기는 힘들다.
역사란 건 길고 짧음으로 말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잡지 20년이면 청춘일 수도 있고 노망기에 접어들었을 수도 있다. 그 기준은 원칙을 지키느냐 마느냐다. 그게 국내면이든 국제면이든 다를 바가 없다. 동지들에게 생일 선물로 타이 속담 하나를 보낸다.
“십 빠악 와아 마이타오 따아 헨”
(สิบปากว่าไม่เท่าตาเห็น).
입 10개로 말하는 것과 눈 하나가 다르다는 건데, 경험을 중시하는 속뜻을 담은 말이다. 눈이 가려면 발이 따라갈 수밖에 없다. 발이 가야 하는 게 우리 팔자다. 그 발로 우리가 가고 없을 50돌에는 빛나는 전통 하나쯤 넘겨줄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그래도 아쉽다. 팔팔한 20대 기자들을 국제 뉴스 현장에 마구 집어넣어 국제 언론들과 승부를 걸어보면 어떨까? 멋있지 않겠는가?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asianetwork@hani.co.kr*정문태 전선기자는 속, 잡지 속 잡지 아시아 네트워크의 ‘편집장’(팀장)을 지냈습니다. 아시아 네트워크의 모토는 ‘아시아 뉴스를 아시아의 손으로’였습니다. 기자가 겸손하게 얘기하듯 의 사상 유례없는 배포 있는 국제 기사는 그가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아시아에게 1달러는 무엇인가’ 등의 기획도 새로웠지만, 무엇보다 그의 책 제목 처럼 발로 뛰며 만난 무수한 사람들이 그를 에너자이저로 만들었습니다. 하마스의 정신적 지도자 야신의 마지막 메시지를 받아 실었고, 야만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아체에서 받은 가장 참혹한 표지를 내세운 은 그와 함께했기에 20년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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