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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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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발이 오그라들어도 할 수 없이, 사랑

나의 33년 지기, <또 하나의 약속>에 출연한 배우 윤유선
“황상기씨에게 당신의 아이를 잊지 않겠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을 뿐”
등록 2014-02-25 14:56 수정 2020-05-03 04:27
윤유선은 내가 33년 전에 처음 만난 어릴 때 친구다. 이야기를 나누다 취재수첩을 슬그머니 덮고 긴 시간 아줌마 수다를 떨었다.탁기형

윤유선은 내가 33년 전에 처음 만난 어릴 때 친구다. 이야기를 나누다 취재수첩을 슬그머니 덮고 긴 시간 아줌마 수다를 떨었다.탁기형

내가 윤유선을 처음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무려 33년 전이다. 어린이 퀴즈프로쯤 되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였다. 탤런트 딸일 뿐 평범한 어린이였던 난 생애 첫 방송 출연에 바짝 긴장해 있었고, 탤런트 어린이 유선인 ‘자기 방’에 놀러온 또래들을 친절하고 유쾌하게 맞이해주었다. 내게 뭔가를 상당히 많이 물어봤던 걸로 기억하지만 지금은 그저 정말 예뻤던 이 아이의 얼굴과 외모완 딴판인 털털한 태도만 기억에 남아 있다.

어릴 때 친구가 다 그렇듯 살면서 몇 번 못 만나도 만날 때마다 어제도 본 사이 같았던 우린 어느덧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 여배우들이 돼 있다. 언제 봐도 편한 친구이지만 난 그녀의 팬이기도 하다. 그녀의 편안하고 정확한 연기는 오랜 세월이 함께하며 더욱 깊어지고 솔직해졌다. 일반 대중이 갖고 있는 그녀의 이미지 역시 내가 가진 그것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역 배우 출신의 예쁘고 연기 잘하는 아줌마 탤런트’. 당최 스캔들이라고는 나질 않는, 심지어 ‘치명적인 매력’ 따윈 키우지 않는 평탄하고 무난하기 이를 데 없는 탤런트였다. 그런 그녀가 찍는 거 자체가 용기인 영화 에 자진해서 출연했다.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심을 말하면 통할 거야, 아님 할 수 없지 뭐”

스태프들은 두 분이 친구시냐며 흥미로워했다. 나는 20년 선배님이자 ‘아버지의 동료’ 되는 분을 감히 친구라 할 순 없다며 농을 한다. 앉자마자 놀렸다. “너 이제 그 회사 광고는 다 했다.” 킬킬거리는 내게 그다운 대답이 날아온다. “괜찮아, 옛날에 해봤어.” 따고 배짱이냐며 웃다가 이 영화에 참여한 그의 속내를 진지하게 물었고 그 역시 진지하게 대답했다. 자긴 이 영화를 사람들이 말하는 ‘운동 차원’에서 한 게 결코 아니라는 거다. 이 영화는 엄연한 상업영화이고 사정이 힘들다 하고 내용이 좋으니 적게 받았을 뿐 무료 출연도 아니며 그저 영화 퀄리티 자체로 평가받으면 좋으련만 영화가 ‘싸움의 도구’가 되는 건 자기가 원하는 분위기가 아니란다. 이런 산재 사고가 있는 줄은 대본을 받아보기 전까진 몰랐고, 시스템에 대해 과하게 불신하고 부정하는 이런 기운에 자기는 100% 동조하지 않는다고 선을 분명히 그었다.

일부 네티즌들은 이런 사실을 대본 받아보고서야 알았다는 자신에게 욕을 하더란다. 자기는 그런 분위기도 참 이해하기 힘들다는 거다. 아니 그럼 사람들은 세상 모든 불의를 다 알고 살아간단 말이더냐. 난 내 인생 꾸려가는 데만도 벅차서 몰랐다. 모를 수도 있지. 그녀에겐 이른바 ‘386의 부채’ 같은 게 없어 보였다. 이 영화 한 편으로 그 회사가 사과한다거나 산재 인정이 돼서 모든 희생자의 보상이 이뤄질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고 했다. 나와 나이도 같고 직업도 같지만 많이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건 모르지 않았기에, 그럼 대체 돈도 사회 변화도 명예도 아니라면 이 영화에 출연한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시나리오를 읽고 마음이 움직였단다. 황상기(박철민 분)씨에게 당신의 아이를 잊지 않겠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란다. 그저 그게 자기가 할 일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단다. 아무리 신문을 안 보고 산다고 해도 권력이 자기에게 불리한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실제 불이익을 주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정말 모르진 않을 텐데 불안하진 않았느냐 물으니 그녀의 입에서 이런 놀라운 대답이 나왔다. “외부 압력? 정말 그런 게 있을까? 지혜야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진심을 말하면 다 통할 거야. 알아,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만약 정말 그런 게 있다면… 그래도 할 수 없지, 뭐.”

대안학교와 선행학습 안 시키기

모든 현황과 사안을 프레임화하고 시스템 문제로 받아들이며 살아오던 내겐 이런 대답은 정말이지 할 말을 잃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남편이 집안일을 도와준다’는 표현을 쓰는 그녀에게 내가 맞노동이 있으면 맞가사는 당연한 거니 ‘도와준다’라는 표현을 쓰지 말자고 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그녀의 반응은 “너 참 재밌다. 그냥 도와줘서 고맙다는 건데 거기에 뭐가 그리 분석이 많니. 난 우리 남편한테 불만 없어. 그냥 고마워하고 우리끼리 잘 지내면 되는 거 아냐?”였다. 현명과 지혜 앞에서 논리와 정의가 망신을 당한 셈이다. 그녀는 그런 식이다.

그녀의 그런 부드럽지만 강한 철학의 바탕엔 깊은 신앙과 멋진 부부관계가 깔려 있다. 신앙의 힘은 이해됐지만 남편은 걱정해주지 않더냐 물었다. 아내의 일엔 아무런 참견도 하지 않는단다. 그래도 어쨌든 말리지 않은 그녀의 남편은 서울대 85학번이다. 운동권이었느냐는 질문에 “몰라”라는 대답이 나온다. 아닌 것도 아니고 모른다니. 보기에 없는 답을 고른 그녀의 얼굴 위로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표정과 함께 예의 “지혜 너 참 재밌는 애야”라는 표정도 지나간다.

소개 반 연애 반으로 결혼한 그녀 부부는 결혼 14년차를 맞는 지금도 친구처럼 대화하고 낄낄대며 지낸다고 한다. 부부 사이가 ‘하하’ 웃는 관계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낄낄’대는 관계가 더 바람직한 관계라고 나는 믿는다. 각자 일하느라 바빠서 결혼기념일이나 생일 같은 거 못 챙기며 살지만 생일이 1월17일인 아내에게 어느 날 낮 1시17분에 네 생일 숫자라 생각나서 전화했다고 하는 로맨티시스트 남편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유일하게 선행학습을 하지 않는 아이로 자라고 있다. 이 대목에서 아예 대안학교로 아이를 보낸 나보다 일반 학교에 다니면서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는 네가 더 대단하다 했고, 그녀 역시 본인도 그리 생각한다 해서 또 깔깔 웃는다.

어느덧 ‘취재수첩’은 슬그머니 덮고 긴 시간을 아줌마 수다만 떨다 왔다. 이 영화에서 “정치는 표면일 뿐 경제가 본질”이라는 말이 나온다. 영화의 주제인 동시에 우리 사는 세상의 본질이다. 자본은 권력을 무서워하는 척하고 권력은 자본을 안 무서워하는 척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얘긴 유선이 앞에서 꺼내지도 못했다. 그녀는 영화에 출연한 이유를 말하며 ‘그게 내가 할 일’이라고 말했다. 억울하고 슬픈 일을 당한 이웃을 봤을 때 우리 같은 ‘딴따라’가 할 수 있는 일. 그건 ‘굿’이 아니었던가.

논리는 표면일 뿐 사랑이 본질

‘논리는 표면일 뿐 사랑이 본질’이라는 말은 교회 주보에서나 쓰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적어도 내가 그런 말을 쓰는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고 오는 길에 내가 그 말을 쓸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손발이 오그라들어도 할 수 없다. 사랑, 그걸 한번 믿어보는 거다. 세계관 다른 게 무슨 상관이며 논리가 다 무어냐 말이다. 이런 영화에 출연한 것 자체도 멋진 일인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열심히 홍보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든 생각이다.

오지혜 배우·장소협찬 카페 꼼마*많은 이들은 배우 오지혜를 소신 있는 배우, 를 흐드러지게 부르는 배우로 기억하지만 은 ‘우리 편’으로 기억합니다. 배우 오지혜씨는 과 독자로 먼저 만났습니다. 명색이 배우가 생활 사정이 어려워졌다고 영화 주간지 구독을 끊고 만 구독했습니다. 그 소식이 전해져 ‘이주의 독자’란에 소개됐습니다. 덥석 연재를 맡겼더니 배우가 이래도 되나 싶게 유려한 글을 보내왔습니다. 전무후무, 오지혜가 만난 ‘딴따라’는 자기 이야기를 찰떡같이 알아듣는 ‘딴따라’에 속을 홀딱 벗어 보여주고, 딴따라는 그 이야기를 콩떡같이 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은 언제나 오지혜씨의 ‘팬’입니다. 2003년 제442호(1월16일치)에 연재를 시작해 제504호까지 1년4개월간 격주로 연재했고, 2005년 부정기로 부활해 2006년까지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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