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으로 난 창으로 북한산 끄트머리가 보이고 길 건너 아파트 불빛과 공사 중인 현장이 보인다. 창 앞에 놓인 그레이색 슈퍼싱글 침대 위에는 지난겨울에 바꾼 민트색 이불이 덮여 있다. 그 옆으로 선배에게 선물 받은 기다란 전구 일체형 스탠드가 놓여 있고, 책꽂이 겸 장식장으로 쓰는 선반형 꽂이가 있다. 어머니가 사주신 무선청소기, 그 옆에 컴퓨터가 있고, 티브이 겸 컴퓨터가 놓인 빌트인 테이블이 있다. 의자는 하나, 책상 의자가 있다.
왼쪽 벽면 전체가 수납공간이다. 요즘 입는 옷들과 속옷, 양말이 정리되어 있고, 그 앞에 햄스터가 사는 커다란 리빙 박스 하나와 사슴벌레가 사는 작은 리빙 박스 2개가 있다. 냉장고에는 냉동 도시락 10팩이 있고, 주방에는 라면을 끓일 손잡이가 기다란 냄비 하나와 양손잡이 냄비 하나, 밥공기와 국그릇 큰 것과 작은 것 하나씩, 접시는 사이즈별로 하나씩 3개, 수저 2세트, 컵 3개, 그리고 숙모가 보내준 전자레인지, 이모가 선물한 3인용 전기밥솥이 있다. 욕실에는 수건 10장, 물걸레 밀대 하나, 현관에는 슬리퍼 하나와 운동화 2켤레, 하이브리드 자전거가 세로로 세워져 있다.
이곳은 내가 먹고 자는 방이자 집이다. 여기서 나는 스물여덟의 봄을 지나 여름, 가을을 지낼 것이다. 아침 8시에 일어나 자몽향 보디워시로 샤워하고, 아침 약을 들고 8시30분 지하철을 탄 뒤 센터에 가서 컴퓨터를 배우고, 점심을 먹고 이 방으로 돌아와 4시간 재택 아르바이트를 하고, 도시락을 데워 먹고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고, 저녁 약을 먹고 밤 9시에 잠들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처방을 받고, 주말에는 본가에서 아버지가 만든 두부찌개와 어머니가 만든 부추전을 먹을 것이다.
내 일상은 평범해 보이지만, 열세 살 어린이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스물여덟은 그냥 오지 않았다. 그것은 상상 이상이다.’
여기까지는 나무가 되어 써본 일기다. 이사하는 날의 일기. 이후 해피엔딩이었으면 좋았겠지만 계획은 수정하라고 있는 법. 나무는 아침 8시에 일어나지 못했고, 재택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못했으며, 헬스장도 여남은 날밖에 가지 못했다. 빨래는 쌓여갔고, 6평 오피스텔 바닥에는 사슴벌레 톱밥이 나뒹굴었다.
나무의 독립은 1년 뒤 오피스텔 계약 기간이 끝나면서 중단됐다. 나무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고, 주중에도 본가에 자주 갔다. 경제적 독립이 되지 않은 독립은 독립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외로움이 컸다.
하지만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나무는 밀린 빨래를 돌리고 널고, 카레라이스를 데워 먹고, 이따금 파스타를 요리하고, 분리수거를 했다. 플라스틱은 플라스틱대로, 종이는 종이대로 버리기. 이건 나무가 가장 자신 있는 종목이다. 게다가 매달 관리비 청구서도 챙겼다. 이웃도 생겼다. 오피스텔 1층의 부동산 사장과는 국밥을 두 번 먹었고, 길 건너 돼지껍질 구잇집 사장은 마늘장아찌를 챙겨줬다.
혼자 산다는 것. 밥을 챙기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 이것은 자신을 돌보는 일이다. 나무는 1년 동안 자신을 돌보는 법을 배웠다. 다시 본가로 들어온 나무는 쌀을 씻어 밥하고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린다. 수저를 놓고 반찬을 챙긴다. 식사 준비는 나무가, 설거지는 엄마가. 이렇게 역할을 분담한다. 본가에서도 분리수거와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는 나무 몫이다.
정신질환 당사자에게 생활 훈련, 즉 자기돌봄은 필수다. 진단을 받고, 초기 발병 단계에 적극적인 치료를 하고, 어느 정도 기능이 회복됐다면 그다음 단계는 일상생활을 잘 영위하는 것이 치료의 핵심이다. 식사 챙기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잠드는 것, 한 달 생활비를 관리하는 것. 이런 일상을 유지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조현병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조현병 치료는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가 정확한 증상을 파악하고 그것에 맞는 치료법을 찾는 것이라면, 2단계는 퇴원 뒤 외래 치료를 하면서 친밀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생활로 복귀하는 과정이고, 3단계는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 맺고 직업교육을 거쳐 경제적 활동을 하는 것이다. 당사자의 자기돌봄은 2~3단계에 걸쳐 조현병 치료의 기본이 된다. 가족이 당사자의 식사, 빨래, 청소를 챙기는 것은 한시적이다. 가족 유형이 다양해지는 지금 상황에서 가족 돌봄에만 기댈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대개 청년기에 발병해 평생 가는 질병이 조현병이기 때문에 당사자가 스스로를 돌볼 수 있어야 이 병과 오랜 기간 동거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나무가 독립하겠다고 했을 때 우리는 반대하지 않았다. 대출해 보증금을 마련하고 매달 생활비를 대느라 허리가 휘었지만 이것도 치료라고 생각했다. ‘입원비보다 훨씬 싸잖아’ 하면서. 혼자 생활하는 것. 자기 공간을 청소하고 관리비를 챙기는 것. 이것들은 어른이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니까. 대개는 우리가 먼저 갈 것이고, 우리가 떠난 다음에 나무는 혼자 살아가야 하니까.
오늘 저녁에는 나무가 밥을 고슬고슬하게 할까? 소고기뭇국은 데워놓을까? 날이 선선해지면 요리도 부탁해야겠다.
혼자 밥하고 분리수거하는 일상. 그렇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 나무에게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줄 것이고, 또 내일을 살게 할 것이다.
“이 경기에서 나는 결승점을 향해 서둘러 달려가지 않는다. 결승점이란 없기 때문이다. 따야 할 메달이나 트로피도 없고 찬가도 응원도 없다. 또 하루를 살아냈다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또 하루를 보냈다는 깊은 만족감만 있을 뿐.”(‘나는 정신병에 걸린 뇌과학자입니다’, 361쪽)
윤서 여성학 박사
*정신병동에서도 아이는 자라요: 16년째 조현병과 동거하는 28살 청년 ‘나무’(가명) 이야기를 어머니 윤서(필명)가 기록한 글. 조현병을 앓는 나무의 시점에서 이지안이 그림을 그립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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