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은 남았어?” ‘밤손님’이 물었다. “더위 먹고 죽다 살았어요.” 여민희씨가 말했다. “왜 더위를 먹어, 피해야지.” 침을 쑥쑥 찔렀다. “아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많이 놔요.” 여민희씨가 비명을 질렀다.
침가방을 든 밤손님이 종탑을 올랐다. 그는 매주 월요일 밤이면 ‘출몰’한다. 한의사 오춘상(오씨3대한의원) 원장이다. 8월12일 밤 종탑 맞은편 재능교육 사옥이 네온빛을 뿜었다. 형광전구가 밝히는 좁은 천막 안에서 오 원장이 두 사람의 맥을 짚었다. 심리적 스트레스가 많다는 여민희씨에겐 신경성 위염을 다스리는 침을, 모든 관절이 아프다는 오수영씨에겐 울체(가슴에 얹힌 답답한 기운)와 근육통을 풀어주는 침을 놨다.
오 원장은 오수영·여민희씨가 종탑에 오른 직후부터 두 사람의 200일을 지켜왔다. 서울 관악구에서 진료를 마친 뒤 서둘러 종탑을 찾으면 밤 8시30분에서 9시쯤이 된다. ‘재능 해고자들의 한의사’가 된 건 2010년 겨울 서울시청 옆 환구단 농성장 시절부터였다. 경기도 평택 대추리와 서울 용산 남일당을 찾으며 ‘연대진료’를 해온 그였다. 거리에서 살아가는 재능 해고노동자들은 ‘화병 덩어리’였다.
“땅에서 만났을 때부터 이미 망가져 있었어요. 설 직후 종탑에 처음 올라왔을 땐 저부터 너무 어지러웠어요. 용산 참사가 설 연휴 직전에 일어났어요. 두 사건이 오버랩돼서 심란했습니다.”
오 원장은 “두 사람은 치료가 듣지 않는 상태”라고 했다. 의식주가 안정되지 않으면 진료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수면장애를 겪는 여민희씨는 종종 경련성 위염으로 내장이 꼬이는 고통을 호소한다. 오수영씨는 환구단 농성 때부터 패혈증을 앓아왔다.
“맺힌 게 많다는 게 문제예요. 극악한 환경에서 농성이 장기화되면서 자기 안의 갈등이 소화기 계통에 타격을 가하고 있어요. 종탑에서 내려오면 정혜신 박사(신경정신과 전문의)에게도 치료받도록 할 생각입니다.”
오 원장은 “재능교육 사 쪽이 빨리 이 상황을 끝내주지 않으면 안 된다”며 두 사람의 건강을 우려했다. 그는 종탑에 처음 올라온 날 오수영·여민희씨에게 말했다. “시작은 함께하지 못했으나 끝은 함께하겠습니다.” 그는 한마디 ‘말실수’ 때문에 매주 종탑에 오른다며 웃었다. 2주 전 셋째딸을 얻은 그의 종탑 진료가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이문영 기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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