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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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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는 지금 죽도록 목마르다



기원전부터 공놀이한 나라, 리그는 강한데 월드컵에선 ‘후진국’…
경제위기로 침체된 국민에게 희망 줄까
등록 2010-06-11 20:55 수정 2020-05-03 04:26
수천 명의 그리스인이 지난 5월20일 아테네 의회 건물 앞에서 정부의 재정 감축안에 맞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REUTERS/ PASCAL ROSSIGNOL

수천 명의 그리스인이 지난 5월20일 아테네 의회 건물 앞에서 정부의 재정 감축안에 맞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REUTERS/ PASCAL ROSSIGNOL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가면 기원전 400~500년에 만든 독특한 부조 작품을 볼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전라의 남성은 양팔을 늘어뜨리고 오른쪽 무릎을 들어올리고 있다. 그의 오른쪽 허벅지 위에는 공이 놓여 있다. 축구 선수가 공을 허벅지로 다루는 모습과 흡사하다. 축구 사학자들은 이 작품을 들어 축구의 기원을 그리스에서 찾기도 한다. 권위 있는 독일어 고대학 백과사전인 를 보면, 그리스에서 기원한 ‘아포푸도발리아’라는 스포츠가 로마군을 통해 1~2세기에 영국으로 건너갔다고 소개하고 있다. 아포푸도발리아는 ‘발로 걷어차기’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font color="#00847C">월드컵에서 한 골도 못 넣어</font>

고대 그리스의 단편 희곡에도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그는 공을 소유하고 웃으면서 동료에게 패스하고 상대편을 피해간다. 그는 상대를 밀어젖히고 또 다른 사람을 독려하기도 한다. ‘바깥으로! 계속! 저 사람 지나서! 저기 넘어서! 낮게! 그리고 위로! 짧게!’ 그리고 ‘조심해! 뒤에 사람!’이라고 어지럽게 외치면서.”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희극작가 안티파네스가 묘사한 공놀이의 모습이다.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에서 유행한 ‘파이난다’라는 공놀이를 그린 문장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공놀이의 기록을 열심히 남겼지만, 정작 후손은 오랫동안 바깥 세계에 축구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그리스인이 출연한 가장 유명한 ‘A매치’는 영국의 악명 높은 코미디 그룹인 ‘몬티파이튼’이 연출한 독일-그리스전이었다. 70년대 지적인 코미디로 일세를 풍미한 몬티파이튼 그룹은 1972년 그리스와 독일의 철학자들을 소환해 뒤죽박죽 축구 경기 작품을 만들어냈다. 4분짜리 작품에 담긴 경기에서는 독일 공격수인 니체가 주심인 공자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말했다가 옐로카드를 받거나, 아르키메데스가 마침내 축구공의 사용법을 알아내고(유레카!) 올린 크로스를 소크라테스가 헤딩슛으로 결승골을 넣는 모습이 분주하게 그려진다. 후반전에 오스트리아인인 비트겐슈타인 대신 교체선수로 경기장을 밟은 카를 마르크스는 결승골을 두고 ‘오프사이드’라고 항의한다. 몬티파이튼 그룹이 만든 단편 가운데 최고로 꼽히기도 하는 이 작품은 지금도 유튜브 등을 통해 볼 수 있다.(지난해 개봉한 을 연출한 노장 감독 테리 길리엄은 이 작품에서 칸트 역을 맡았다.)

세계 축구계가 고대가 아닌 동시대 그리스인의 축구 실력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 건 1980년대에 접어든 이후였다. 오래 변방에 머물던 그리스는 유로80 본선에 처음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조 편성은 악몽에 가까웠다. 유로72와 74 월드컵 우승국인 서독, 74·78 월드컵 준우승국 네덜란드, 유로76 우승국 체코슬로바키아가 한 조였다. 결과는 네덜란드전 1-0 패, 체코전 3-1 패, 서독전 0-0 무승부였다. 망신당하지 않은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 처지였다. 그 뒤로도 오랜 침묵을 거친 그리스 국가대표팀이 다시 세계 무대를 밟은 것은 1994년 월드컵이었다. 이번에는 망신을 당했다. 아르헨티나와 불가리아에 잇따라 4-0으로 진 뒤, 나이지리아에도 2-0으로 참패했다. 3전3패에 점수는 10-0이었다. 1998·2002·2006 월드컵 본선 진출에 거푸 실패한 그리스는 이제껏 월드컵에서 한 골도 넣지 못했다.

2004년 7월5일 그리스 아테네의 파나티나이코스 운동장에 모인 인파가 그리스 대표팀이 유로2004에서 우승하자 폭죽을 터뜨리고 국기를 흔들며 열광하고 있다. REUTERS/ YANNIS BEHRAKIS

2004년 7월5일 그리스 아테네의 파나티나이코스 운동장에 모인 인파가 그리스 대표팀이 유로2004에서 우승하자 폭죽을 터뜨리고 국기를 흔들며 열광하고 있다. REUTERS/ YANNIS BEHRAKIS

<font color="#C21A8D">그리스리그 최강자, 올림피아코스</font>

국제무대 성적으로는 ‘축구 후진국’에 가깝지만, 클럽 축구로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리스의 프로축구 리그인 슈퍼리그는 선수들의 높은 경기력과 열광적인 응원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유럽축구연맹(UEFA)은 그리스의 슈퍼리그를 유럽 전체 리그 가운데 12위로 분류했다. 기성용이 뛰고 있는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나 벨기에 주필러리그보다 평가가 높다.

슈퍼리그도 다른 리그와 마찬가지로 주요 팀 3~4개가 리그 전체를 주도하는 상황이 오래 이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도 최고의 명문팀은 이론의 여지 없이 ‘올림피아코스’다. 1925년 3월 그리스 아테네의 피라에우스 항구 주변 지역에서 창단됐다. 1996년 이후 14시즌 가운데 12번 우승할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을 자랑한다. 영국으로 치면 박지성이 활약하고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해당한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올림피아코스와 세르비아의 클럽인 레드스타 벨그레이드, 러시아의 스파르타크 모스크바는 스스로를 ‘그리스 정교회의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서로 열띤 응원을 보낸다. 동·남부 유럽 축구의 면모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역시 아테네에 둥지를 튼 ‘파나티나이코스’도 올림피아코스의 전통적인 라이벌이다. 올해 슈퍼컵에서는 파나티나이코스가 6년 만에 올림피아코스를 밀어내고 우승컵을 들었다. 파나티나이코스는 ‘범 아테네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지난 5월에 발표된 그리스 국가대표팀 예비 엔트리 명단 30명 가운데 이 팀에 소속된 선수만 무려 10명이었다. 여기에 브라질 국가대표인 지우베르투 시우바와 프랑스 국가대표 공격수인 지브릴 시세 등 화려한 외국인 선수진도 자랑하고 있다. 올림피아코스가 전통적으로 노동계급을 팬으로 거느린 것과 달리, 파나티나이코스는 아테네 중심부 상류층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스 축구 ‘3강’ 가운데 마지막인 ‘AEK 아테네’의 역사는 그리스의 근대사와 궤적을 함께한다. 1923년 터키 케말 파샤의 터키 공화국과 벌인 전쟁에서 참패한 그리스는 콘스탄티노플 등 소아시아 일대에 살던 자국 주민을 대거 아테네로 이주시켰다. 이렇게 17만 명 수준이던 아테네의 인구는 단번에 42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때 아테네로 이주해온 피난민들이 1924년 아테네에서 결성한 스포츠 클럽이 AEK 아테네다. AEK라는 그리스어 약자를 풀면 ‘콘스탄티노플 운동클럽’이라는 뜻이다. 이 클럽의 상징인 노랑 바탕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 모양은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둔 비잔틴제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font color="#008ABD">유로2004 우승 이끈 레하겔의 ‘잠그는’ 축구</font>
유로2004의 깜짝 우승으로 그리스의 국민적 영웅이 된 오토 레하겔 감독. 로이터.

유로2004의 깜짝 우승으로 그리스의 국민적 영웅이 된 오토 레하겔 감독. 로이터.

유럽 축구의 주변부을 서성이던 그리스는 2004년 단숨에 세계의 이목을 끄는 ‘사고’를 쳤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유로2004에서 그리스 국가대표팀은 예상을 깨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월드컵과 유로80을 통틀어 단 한 골만 넣으며 1무5패를 기록한 그리스는 2004년 스페인과 비긴 뒤 프랑스·체코·포르투갈을 완파하며 축구 사상 최대 이변을 연출했다. 주인공은 그리스인이 아닌 독일인 오토 레하겔 감독이었다. 올해 72살인 노감독은 특히 2류팀을 단련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81년 2부 리그로 강등돼 있던 독일 프로팀 베르더 브레멘의 감독을 맡아 1부 리그로 승격시킨 뒤, 세 번의 리그 준우승과 우승 한 번을 일궜다. 또 97·98 시즌 그는 다시 카이저슬라우테른을 2부에서 1부로 끌어올린 뒤 이듬해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루는 위업을 달성했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스 국가대표팀은 레하겔이 선택한 세 번째 ‘외인부대’였다. 그리스 국가대표팀은 철저히 ‘레하겔표’ 축구 전법을 구사한다. 오랜 동안 변방에 머물던 그리스식 축구에 레하겔 감독이 이식한 전술은 화려한 기술 축구가 아니라, 체격 조건이 좋은 수비수들을 중심으로 ‘걸어잠그는’ 축구다. 유럽에서는 구닥다리로 취급받던 그의 전술은 2004년 멋지게 열매를 맺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난 유로 2004 포르투갈과의 결승전이었다. 그리스는 수비 라인을 뒤로 늦추다가 역습 기회에 맞은 단 한번의 유효슈팅을 성공해 승리를 거뒀다.

그의 ‘잠그기’ 전술은 이번 월드컵에서도 이어질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전망이다. 특히 지난해부터 레하겔 감독이 중점을 두고 연마하고 있는 ‘3-4-3’ 전법을 들고 나올 확률이 높다. 흔히 최후방 수비수를 세명 두는 3백 전술은 4백보다 방어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4백에서는 좌·우 윙백이 공격적인 역할도 맡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종종 전방까지 올라와 슈팅까지 때리는 윙백인 차두리나 이영표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반면 3백은 공격은 자제하고 수비에 치중하는 경향이 크다. 여기에 그리스는 수비로 돌아설 때는 양쪽 윙이 수비에 가담해 5백을 이루는 밀집 수비대형을 이룬다. 이런 ‘벌떼수비’가 월드컵 예선 12경기에서 5골만 내준 비결이었다. 우리나라의 박지성, 이청용 등 발 빠른 선수들이 그리스 수비의 뒷공간으로 빠르게 침투해 들어갈 수 있느냐 여부가 승부를 가르는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의 코너킥이나 프리킥 상황에서 몸집이 좋은 그리스 선수들을 어떻게 기술적으로 막을지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그리스의 주전 11명 가운데 키가 190㎝를 넘는 선수만 3명이다. 우리나라 선수단에서 최장신인 정성룡의 키가 190㎝다. 그리스는 최근 열린 북한전에 프리킥으로만 두 골을 넣었다.

한국과 그리스의 경기에는 또 다른 ‘애환’이 깃들어있다. 두 나라 모두 지난 10년 사이 극단적인 금융위기를 겪었다. 지난해 10월 집권한 그리스 사회당의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이 전 정권이 발표한 6%가 아니라 12.7%라고 실토했다. 신용평가사 피치는 그리스 국가신용등급을 한 단계 내렸다. 국제 금융시장은 요동쳤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그리스 경제를 떠받치는 두 지주인 관광업과 해운업은 이미 타격을 받은 상황이었다. 인구 1100만 명 남짓한 그리스 경제는 올해 1분기까지 6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실업률은 1년 사이에 3%포인트 뛰었다. 그리스 정부는 2014년까지 재정적자를 GDP 대비 2.6%로 낮추겠다고 선언했다. 국제통화기금 등으로부터 3년에 걸쳐 1100억유로의 자금 지원을 받는 대가였다.

<font color="#A341B1">“우리는 국민을 위해 좋은 결과를 내야”</font>
 1994년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기념해 그리스에서 제작된 우표. 고대 그리스인이 공을 다루는 부조 작품을 근거로 일부 역사학자는 축구의 기원을 그리스에서 찾고 있다.

1994년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기념해 그리스에서 제작된 우표. 고대 그리스인이 공을 다루는 부조 작품을 근거로 일부 역사학자는 축구의 기원을 그리스에서 찾고 있다.

로 유명한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자신의 누리집에 이번 재정위기가 미국 등이 꾸민 짓이라고 비판했다. 구제금융의 대가로 그리스 정부가 내놓은 공무원 복지수당 대거 삭감, 민간부문 정리해고 요건 완화 등의 조처를 비난하며 시민들도 거리로 나섰다. 지난 5월5일에는 정부의 재정지출 감축안에 반대하는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시민 3명이 사망했다. 그리스 대표팀도 엄중한 상황을 인식하고 있다. 대표팀 주장인 게오르기오스 카라구니스는 지난 5월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국내 상황(금융위기)을 보면, 우리는 국민을 위해 좋은 결과를 내야 한다”고 각오를 다졌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겪은 이듬해 봄,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축구 대표팀은 월드컵에서 한번 지고, 두번 패한 뒤 쓸쓸히 귀환했다. 레하겔 감독은 지난해 말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차범근 감독을 ‘두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표시한 바 있다. 그가 이번 월드컵에서 그리스 국민에게 어떤 소식을 전해줄지 두고볼 일이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font color="#638F03"> 참고 문헌: (민음인), (사커라인), (리수)</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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