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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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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을 포기하라, 축구에 몰입하라



미디어와 기업이 만든 응원의 장엔 열정 대신 획일성만…
32개국의 축구, 그 다양한 목소리를 즐겨보자
등록 2010-06-11 17:50 수정 2020-05-03 04:26
미디어와 기업이 마련한 ‘광장’은 연대와 열광의 장소가 아니다. 5월16일 한국 대표팀의 월드컵 출정식에서 환호하는 팬들. 한겨레 김진수 기자

미디어와 기업이 마련한 ‘광장’은 연대와 열광의 장소가 아니다. 5월16일 한국 대표팀의 월드컵 출정식에서 환호하는 팬들. 한겨레 김진수 기자

“축구는 생태학적 균형을 찾아가는 스포츠다.” 이렇게 근사한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현 레알마드리드 단장 호르헤 발다노의 명언이다. 피구, 호날두, 지단, 베컴 등을 영입하면서 ‘은하계 최고의 클럽’을 만든 발다노 단장은 소문난 독서광이자 소설가이자 축구공으로 사유하는 철학자로도 불린다. 그는 현역 시절에 늘 신문과 잡지와 소설을 끼고 살았는데, 1986년 월드컵 우승과 1990년 월드컵 준우승을 이끈 카를로스 빌라르도 감독은 발다노에게서 문자를 빼앗는 것이 또 하나의 중요한 작전이라고 했다. 그가 2009년 4월 축구전문지 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만 명이 열광하는 행위의 원인에 대해 깊이 사유하지 않는 사람은 지식인이 아니다.” 이 한마디를 위해서 우회로를 조금 돌아본 셈인데, 이제 이 말의 안과 밖을 살펴보자.

움베르토 에코는 에서 축구 그 자체가 아니라 축구에 열광하는 팬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다. 에코는 “품위 있는 경기의 모든 장점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다만 축구팬들을 싫어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가 싫어하는 축구팬은, 축구를 통해 자신의 일그러진 신념과 가치관을 강렬하게 피력하는 자들이다.

축구장 주변을 서성이는 쇼비니즘

에코가 힐난하는 축구팬은 그중에서도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다른 지방에서 온 축구광을 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얼굴에 주먹을 날리려” 드는 쇼비니즘(맹신적 국수주의)을 현대의 축구장 안팎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에코와 통화를 할 수 있다면 나는 축구장 안팎의 거친 팬들도 할 말은 있지 않겠느냐고, 문자라도 넣어보고 싶다. 그것이 한편으로 보기에는 쇼비니즘의 거친 표현임이 틀림없고 축구장 안팎에서 그 일그러지고 그릇된 욕망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녀석들이 있지만, 일면적으로 그 모든 것을 쇼비니즘으로 비판할 수 없는 내면의 다양성도 없지 않다. 이를테면 2002 월드컵 때 수많은 사람들이 붉은 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외쳤을 때, 한쪽에는 그 색깔을 문제 삼으며 ‘백의민족’ 운운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한쪽에는 ‘집단적 광기’의 단면을 본 사람도 있었다. ‘백의민족’ 운운하는 사람들이야 냉면집의 빨간 천만 봐도 알레르기를 느끼는 족속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붉은색 옷을 입고 똑같은 구호를 외친 것만으로 ‘파시즘의 징후’라고 판단하는 것은, 마치 원두막에서 수박밭을 내려보는 정도의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한 것이다.

철저한 이윤 추구의 테크놀로지

그 외양이란 축구장의 일반적인 풍경일 뿐이다. 국가대항전이 열릴 때면 네덜란드는 일제히 오렌지색 옷을 입고 이탈리아는 푸른색 옷을 입고 브라질은 노란색 옷을 입는다. 한국은 붉은색이다. 그렇게 수만 명이 같은 옷차림을 했다고 해서, 그리고 덤으로 국호를 외친다고 해서 ‘동원된 군중’ 운운한다면 각 나라의 역사적 흐름이나 사회·문화적 사정을 지나치게 일별해버리는 셈이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경우 군사 통치의 뼈아픈 기억에 따른 파시즘적 징후(게다가 당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의 이어지는 정치 행보)가 부분적으로 있지만, 실은 그 외양보다 더 강렬했던 것은 실로 현대사 100년 만에 처음으로 광장과 거리에서 넘실대던 비현실(탈현실)적인 문화적 욕망이었다. 그것은 저마다 다양했고 거침없었다. 이를 빌딩 옥상에 배치된 카메라는 ‘하나되는 대~한민국’으로 포획했고, 그 획일적으로 단일화되는 시선이 전국적으로 복제·확산됨으로써 내면적 다양성이 낡은 국가주의의 포충망에 사로잡힌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그리고 그것에 대응하거나 저항하는 힘이 역부족이었지만, 엄연한 것은 그 거리와 광장과 경기장 안에 흐른 대화와 공기는 결코 단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잉글랜드의 악명 높은 훌리건에 대해서도, 우선 그 양상이 나타나게 된 1970~80년대 영국 사회의 사정을 봐야 한다고 충고한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까지 겪은 영국의 위태로운 경제 상황, 그런데 어이없게도 1979년 선거에서 강경 보수파 대처가 집권하고 이후 사회 사정은 더욱 억압적인 상태로 가게 된다. 이런 국면에서 진정한 축구팬이라면 경기장에서 얌전히 콜라만 마실 게 아니라 거친 소리도 질러보고 거리를 활보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영화 와 소설가 닉 혼비의 기록 가 그 증거물이다. 그 과정에서, 이같은 소동을 혐오하는 경찰과 미디어와 기업은 다양한 방식의 박멸 작전을 펴게 되고, 이에 대응하는 조직, 곧 ‘훌리건’이 등장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경기장 전체에 검게 드리워진 어느 거대한 비밀조직(국제축구연맹·FIFA)과 그들과 이인삼각 플레이를 펼치는 하위조직(거대 미디어와 기업)들이다. 내 생각에 쇼비니즘의 주먹질을 휘둘러보려는 거친 팬들도 문제지만 ‘더 나쁜’ 것은 거대 조직의 철저한 이윤추구와 가치 창출의 테크놀로지다. 이들이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이는 것은 차라리 둘째 문제다.

가장 심각한 것은 그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제거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류의 제전’이니 ‘화합의 한마당’이니 하는 달콤한 말로 지구 전역을 덕지덕지 처바른다. FIFA라는 거대 조직과 미디어와 기업의 공통점은, 권력이 그렇듯이, 대중의 다양성을 통제해 단일화하는 것이다. 그래야 관리에 용이하고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단독 중계권을 따낸 SBS가 쉬지 않고 내보내는 월드컵 특집 프로그램을 보라. 그 안에 ‘단일민족’이 있다. 게다가 세계 곳곳의 다양한 축구장 풍경조차 획일화한다. 그들 자신은 한 번도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데도 브라질은 여전히 ‘삼바군단’이다. 왜 남미의 많은 나라 중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쓰는지 등의 최소한의 상식도 설명하지 않는다. 제국이 강요한 근대적 국가 형태 안에서 오랫동안 전승된 부족의 상이한 종교와 문화 때문에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는 코트디부아르나 나이지리아도 그저 단 하나의 프레임, 곧 한국식 ‘애국주의’ 시선으로 요약된다. 고민 없이 만들고 성찰 없이 송출한다. 기업은 더 말해 무엇하는가. 도대체 대표팀을 응원하기 위해 경쟁 기업들이 앞다퉈 선보이는 서로 다른 구호와 노래를 공부해야 하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졸속으로 만들고 졸렬하게 뿌려댄다.

이번 기회에 각국의 역사와 문화도

이런 국면에서 진정한 축구팬이 할 수 있는 일은 축구 그 자체에 몰입하는 것이다. 이미 광장은 빼앗겼다. 미디어와 기업이 ‘안전’하게 마련했다는 광장이란 연대와 열광의 장소가 아니다. 어떤 점에서 광장은 일시적으로 포기할 수 있다.

올해는 정말로 FIFA가 제약하고 미디어가 관리하고 기업이 동원한, 그런 광장이 될 것이다. 거부하는 게 마땅하다. 대신 축구에 몰입하는 것이다. 세르비아에 몰입하고 멕시코에 몰입하고 스페인에 몰입하는 것, 다시 말해 이번 기회에, 축구를 계기 삼아 32개국의 역사와 문화, 그 다양한 목소리와 사회 상황을 살피는 것, 그럼으로써 적어도 이 지구가 FIFA와 미디어와 대기업이 통제·관리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크고 다양하고 복합적임을 아는 것, 그것이 이번 월드컵에 임하는 진정한 축구팬의 과제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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