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애국마케팅 “이날만을 기다렸다”



TV 광고에서 축구가 아니라 애국을 즐기는 슈퍼히어로들… 영광 재현도 좋으나 제발 적당히
등록 2010-06-11 17:17 수정 2020-05-03 04:26

지금 한국인은 ‘변신’ 중이다. 생활에 찌든 평범한 인물에서 결정적 순간이 오면 본색을 드러내는 슈퍼히어로 ‘레즈’(Reds)로. 주문은 “오~ 대~한민국”, 복장은 ‘빨간 샤쓰’. 깃발 휘날리며 응원에 앞장서는 인물은 싸이와 김장훈. 이른바 ‘일반인’ 같은 외모에 숨겨진 끼를 상징하는 이들이 깃발 들고 앞장섰다.

세계는 그날만을 준비하지 않았다

SK텔레콤의 2010 월드컵 광고. 한겨레 자료

SK텔레콤의 2010 월드컵 광고. 한겨레 자료

‘2002 응원계의 전설’이었으나 ‘2010 새가슴 월급쟁이’로 활약 중인 싸군과 ‘2002 응원계의 노익장’이었으나 ‘2010 (중국집) 배달의 기수’로 살아가는 김장훈이 신호탄을 터뜨린 SK텔레콤의 2010 월드컵 광고는 “사는 게 바쁘고~ 사는 게 아프고~”라는 노래로 시작해 “다시 한번 그때처럼 그 감동의 메아리 울려줘”로 끝난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의 레즈는 어디에 있나요?” 찌질한 이들의 대명사 싸군과 장훈이 불끈 쥔 주먹에 깃발 들고 앞장서면 ‘다시 한번 각성한’ 군중이 뒤따른다. 응원하러 가는지, ‘맞짱 뜨러’ 가는지 모를 만큼 비장한데, 그리하여 우리는 또다시 4년 만에 월드컵 광고의 주술에 걸린다.

KT 올레(Olleh) 광고는 거꾸로 히어로의 허술한 면모를 드러내 웃음을 노린다. 2002 월드컵 영웅인 황선홍·최진철·김태영·유상철이 등장하는 KT의 ‘황선홍 밴드’ 광고. 이들은 월드컵 응원송 “오~ 대한민국~ 승리의 함성~”을 불렀는데, 반주를 지운 음치 같은 ‘생목소리’가 들렸다. 이어 리더인 황선홍은 6월의 남아공이 덥지 않은지도 모르고 사우나에서 응원 연습을 하는 허술한 모습도 나왔다.

여전히 고전적인 방식으로 승부하는 광고도 있다. 현대자동차의 ‘샤우트 프로젝트’는 “전세계가 4년 동안 그날만을 준비했다”는 비장한 선언으로 시작했다. 여기에 나오는 화면은 브라질, 프랑스, 스페인 등의 응원 모습. 여기에 “이번엔 우리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라는 외침이 더해진다. 그런데, 누구나 알다시피 그들은 결코 4년 동안 그날만을 준비하지 않았다. 해마다 국내 리그를 즐겼고, 챔피언스리그를 사랑했다. 이런 시각에는 월드컵 마케팅을 위해 그날만을 기다려온 기업의 아전인수 해석이나, 축구가 아니라 애국을 즐기는 이곳의 풍토가 깊게 스며 있다. 맥스맥주 광고에도 정규 시간 외에 추가 시간을 주는 인저리 타임을 “얹어주는 언저리 타임”으로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축구장에 응원 갔다 벌어지는 상황이다. 광고의 메시지는 ‘맥주 맛도 모르면서’인데, ‘경기 규칙도 모르면서’ 경기장에 가는 것도 이상하긴 마찬가지. 이것도 애국하러 축구장(혹은 야외광장)에 가는 한국에서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2002년 6월을 기억하라’ 향수 마케팅

이렇게 5월부터 시작된 월드컵 광고는 ‘다시 한번 영광을 재현하자’고 호소한다. 여러분이 역사의 무대에서 주인공이 되었던 2002년 6월을 기억하라고 호명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미 허약한 기억을 부르는 향수 마케팅이 되었다. 아무리 즐거움의 사탕을 발라도, 멀어진 감흥이 ‘그때처럼’ 돌아오진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리 주문을 외우고 빨간 옷을 입어도 평범한 이들이 슈퍼히어로가 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족으로 하나만 덧붙이면, 2007년 캄보디아 시엠리아프의 아줌마도, 2008년 타이 방콕의 오토바이 기사도 ‘Be The Reds’ 셔츠를 입고 있더라. 설마 그분들이 지구촌 곳곳에 숨어서 암약하는 슈퍼히어로? 얼마나 티셔츠를 찍어대고 얼마나 남았으면 그때에 거기까지 가 있을까. 제발 적당히.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