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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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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낱같은 희망, 함께 이어가요


힘든 작업 속에서도 살가운 눈빛으로 맞아준 동료들이 활짝 웃는 사회를 위하여
등록 2009-10-01 17:40 수정 2020-05-03 04:25
노동OTL

노동OTL

안산을 처음 간 날의 기억이 또렷합니다. 일자리를 구하겠다면서도 안산역 지하보도에 놓인 구인 전단지를 줍지 못했습니다. 누가 볼까봐요. 인력회사 문을 열기 전 얼마나 주저했는지 모릅니다. 누가 볼까봐서지요. 35살, 같잖은 허위의식은 참 쉽게도 무너졌습니다. 2시간만 일하고선 죽겠다며 바닥에 나앉았고, 허겁지겁 점심밥을 식판에 퍼담았지요. 해소되지 못한 욕망이 식탐으로 방출될 때마다 소스라쳤습니다.

첫 출근을 한 8월11일 아침 8시, ‘날품’을 라인에 배정하러 왔던 A사 생산부장이 “똘똘한 사람 좀 있느냐”고 한 인력회사 관리에게 묻더군요. 우쭐했지요. 관리가 “없습니다” 합니다. 괜스레 달아올랐습니다. 직접 한 명을 골라가겠다더군요. 또 우쭐했지요. 부장은 쓱 둘러보더니 가장 덩치 좋고 젊은 이를 찍습니다. 또 달아올랐지 뭡니까. 의식은 위약하고, 가치는 그리 자의적인가 봅니다.

그래서 제가 본 아주머니, 아저씨 그리고 젊은 청춘들은 진심으로 대단했습니다. 이렇게라도 살아야지 않느냐며, 꼭 작은 가게 하나 열겠다며,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겠다며 10년을 또는 수개월을 라인에 선 이들. 그런데도 다른 ‘가치’는 평가받을 기회가 없는 이들….

원곡동과 고잔 신도시, 다양한 층위

여러분의 도시엔 생활DC마트, 외국인, 관광버스, 노래방, 어린이집이 많았습니다. 여러분은 관광버스를 타고, 이주 노동자와 함께 가난한 일자리로 갔습니다. 아이는 종일 어린이집에서 여러분의 품을 그리워하고, 여러분은 주말 밤 값싼 생활용품을 구입하고 노래방에 들러 겨우 지긋한 삶을 털고 있었지요.

극단적일까요? 외국인은 안산역 일대 원곡동, 정규직은 상록수역 일대, 중·상류층에겐 고잔 신도시가 제 영역이며 계급인 듯했습니다. 중앙동 일대가 휘황한 멜팅폿(Melting Pot·다인종사회)처럼 다양한 층위를 떠안고 있었지요. 한 중국인 노동자가 “원곡동은 외국인이 너무 많고 시끄러워 싫다”며 선부동에 집을 구했다는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너·나’를 경계짓기 바쁘고, 누군가는 자존을 누군가는 굴욕을 내면화하고 있었지요. 안산만의 얘긴가요? 모든 도시, 그래서 곧 조국이 그런 것을요. 가난(한 자)은 오직 가난(한 자들) 안에서 자유로워 보입니다.

불쾌해 마세요. 전체가 펀펀한 안산은 비록 한 번도 가보진 못했지만 녹지공원이 많고 한 번도 타보진 못했으나 자전거길도 잘 가꿔져 애착이 갔습니다.

1995년 대학생 시절, 공장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입대 전 색다른 경험을 하자 했지요. 라인은 없이 아주머니들과 소녀들이 모여앉아 종이상자만 접는 가내 공장이었습니다. 하루에 1만원이란 얘길 듣고 “미친 짓”이라며 오전에 도망쳤더랬습니다. 그리고 주유소에 갔지요. 사장이 고등학생 직원들을 종 부리듯 해 사흘 만에 다투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젠 ‘만용’이 되네요. 엄마도, 아들도, 딸도 비싼 등록금을 벌려고 버둥댑니다. 고액 등록금의 유일한 매력은 ‘먹고 대학생’ 같은 유휴 노동을 원천봉쇄하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도 근로빈곤은 늘기만 합니다. 생존을 넘어 생활, 생활을 넘어 행복을 좇기가 꿈만 같아집니다.

격려하고 조언해준 많은 사람들

노동에 허덕이면서도 많은 분들이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결근 다음날 “왜 안 나왔어?” 하며 씩 웃어준 반장이 고마웠고, 말 걸어준 아주머니들이 고마웠고, 적의 없이 여러 질문에 답해준 청춘들이, 어쨌건 일자리를 알선해준 인력회사 ㅇ 과장도 고마웠습니다.

사연은 궁금한데 알 길은 없으니, 금요일 퇴근길마다 인사도 안 한 분들께 술 마시자 졸랐습니다. 식사 때마다 혼자 밥을 뜨며, 휴대전화에 노동일기를 기록했지요. 누군가는 ‘미친 녀석’이라고 안타까워해줬을 것도 같습니다. 그 관심도 고맙습니다.

기사를 쓰는 내내, 를 들었고, 가수 백지영씨의 를 반복해 들었습니다. 시급 4천원짜리 노동과 삶에 대한 기록은 통속이지만, 모두가 외면하는 통속이 진실이었습니다.

한 달은 안산 시내버스 노선을 다 외기도 부족한 기간입니다. 하지만 그 기간 일을 하며, 임금을 시급 5천원, 1만원으로 올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빈곤노동이 유전만은 되지 않는 내일을 모색해주는 사회가 더 절실함을 충분히 봅니다. 부르길 ‘희망’이라 하는, 오늘 살아야 할 이유가 될 테니까요.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 따위 얘긴, 제 주제에 못하겠습니다. 다들 다치지 말고, 스트레칭도 좀 하시고, 요령도 부려가며 내일도 건강하게 출근하세요. 찬바람 붑니다. 라인이 수만, 수십만 바퀴를 돌면 다시 봄바람이 오겠지요.

추석입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2009년 9월23일 55R라인 9번 임인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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